크리스마스 연휴는 일한다고 바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이 시국에 일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로 생각하는데, 놀러 나온 인파를 퇴근길에 보니 또 그다지 좋은 것 같지도 않은 이상한 느낌이다. 이대로 연휴를 끝내면 너무 우울할 것 같아서 나도 간단히 외식하고 서점에서 책 좀 보다가 왔다.
서점은 오랜만에 왔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뒤라서 그런 걸까. 서점에 놓인 책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전엔 '이 책 재미있을까? 살만한 가치가 있을까?'를 중점적으로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즉, 소비자의 관점에서만 생각했다. 말하자면 손해를 보기 싫다는 거였다.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말이다. 사실 그거 고민할 시간이면 아무거나 한 권을 읽었겠다 싶을 정도로 요즘은 정말 책 한 권도 제대로 못 고르겠다. 정말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뒤엔 생산자의 측면에서도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책이 나와 서점에 놓여 있다는 것만 해도 내가 보기엔 대단하지만... 솔직히 여기 있는 책 중에 손 하나 타지도 못하고 폐기되는 책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책들은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공모전에 당선되지 못한 것도 어쩌면 환경보호를 위해서라는 큰 뜻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의사가 쓴 책도 많았다. 대한민국은 의사가 넘쳐난다! 이젠 의사라는 스펙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세상이다. 나도 면허증 쪼가리 하나로 백지수표처럼 써먹을 생각은 아니긴 하지만, 그저 난 뭘 위해 노력해왔고, 앞으로 뭘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할지, 그러면 괜찮은 건지 이젠 확신이 들지 않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책을 훑어보며 '이 의사 선생님은 이런 얘기로 책을 다 내는데 왜 난 안 되나?'라는 시건방진 생각도 해보기도 하고 '그래도 이분은 책을 냈잖아. 내 이야기도 누가 보면 비슷하게 생각할 거야'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한편 눈에 띄는 건 정지음 작가님의 《젊은 ADHD의 슬픔》이었다. ADHD를 형상화한듯한 무지개색 제목(이거 편견 아냐?)의 표지와 '8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이라고 광고된 띠지가 인상적이었다. 브런치북 대상이 하나만은 아닐 텐데 이 책만 나와 있는 것이 신기해서 잠시 서서 바라보았다.
#2
비록 공모전 결과를 하나 더 기다리고 있지만, 올해 브런치 공모전이 전부 끝나니 정말 2021년도 다 갔다는 느낌이 확실히 든다. 브런치 방문자 수에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내 브런치는 '공모전 관련 글'로 흥했던 것이 맞는 듯하다. 눈에 띄게 우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걸 보니 '26일의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이런 느낌인가보다 싶다. 방문자 수도 '마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전공의 지원이 있었고 합격자 발표가 났었다. 그리고 누군가 떨턴이 되어서 열심히 검색한 결과 내 브런치에도 유입이 된 모양이다. 당장 내가 있는 이 병원만 해도 어디 보자... 올해 대략 20여 명의 떨턴이 발생했다. 우리 병원 인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브런치에 방문해주신 떨턴 선생님께 우선 위로를 전하며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사실 떨턴, 떨턴 하긴 하지만 진정한(?) 떨턴은 '군 미필 남자 떨턴'일 것이다. 군필이나 여자 떨턴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다가 내년에 또 지원할 수 있다. 오히려 바깥 생활을 하다가 다른 길이 풀리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이들이 떨어질 걸 각오하고 인기과에 소신 지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떨어지면 1년 쉬지 뭐' 약간 이런 느낌이다. 즉 대부분의 떨턴들은 여선생님인 경우가 많다.
반면 몸 사려야 하는 건 군 미필 남선생님인데, 이들이 떨턴 되면 일반적으로는 군대로 끌려간다고 보면 된다. 요즘 군대야(?) 할만하다고 하고 '중위' 군의관이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군대는 '군대'이다. 인턴을 마친 나이에 '중위'라는 계급은 매우 애매한 것으로 온갖 불합리한 처사에 '그래도 의사'라고 시기 질투받는 게 예삿일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무려 3년 2개월을 견뎌야 한다! 그래도 현역병은 멋모를 때 입대해서 1년 6개월 복무하고 마니까 솔직히 뭐가 더 나은 건지 잘 모르겠다. 참고로 내가 인턴 땐 그런 식으로 중위 군의관을 하던 선배가 마음의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남자 인턴들이 몸을 사려 거의 모든 과가 경쟁률 '1대 1'을 넘기지 않는 아름다운 현상을 보여주었던 바 있다. 3년 2개월을 다녀오면 병원에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보장도 없다. 여러모로 손해가 클 것이다. 아마 이 제도가 없었다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지원하는 선생님마저 없어 기피과는 전멸했을 것이다. 이 동네도 시스템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제도가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것이다.
떨턴은 발표일 즉시 명단이 작성되어 미달 과 교수님들께 제공된다는 걸 아는가? 병원 입장에서도 기피 과에 사람이 없으면 운영이 힘들기 때문이다. 떨턴에게 바로 전화가 갈 것이다. 당시, 나도 나의 불행을 기회로 삼는 마치 '토끼몰이' 같은 인상을 받아 기분이 나빴다.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전화했나 싶었는데, 병원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짜증 나겠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이미 한참 전의 이야기라 추억같이 말해줄 수 있다. 지나고 보니 무슨 과를 해도 비슷비슷한 것 같다고. 나를 볼 때나 친구들을 보면 말이다. 따라서 미련은 남아도 크게 후회는 하진 않는데, 그렇다고 떨턴에게 '아무거나 해라'라고는 못 하겠다. 떨턴에게 내가 선배랍시고 조언을 하기엔 나도 항상 흔들리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정답이 없고 고민만이 있을 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고민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