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더랜드는 2023년 신작 드라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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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초툰 작가님 브런치를 보다 언뜻 알게 된 신작 드라마 킹더랜드. 뭔 드라마인가 해서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백마 탄 왕자님과 당찬 여주인공.
둘 다 매우 잘 생김.
- 끝 -
요즘 시대에 백마 탄 왕자라니. 진성 페미니스트는 이 드라마를 보면 화병 나서 죽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대놓고 진부한 소재임을 숨기지 않는 건 제작사의 당당함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제작비를 내 지갑에서 가져간 것도 아니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아직도 이런 내용이 먹힌다면 현실이 너무 팍팍해서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드라마는 꿈 그 자체이다.
#1
뭐 그래도 난 왕자님이 좋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무대와 시간은 달라도 왕자님은 순정 만화의 필수 요소다. 난 순정 만화, 드라마 등을 볼 때 솔직히 여주인공보단 왕자님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그건 아마 내가 왕자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어린 나는 그 껍데기라도 흉내 내고 싶었던 거겠지.
하지만, 난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난 게 아니지 않은가? 이 얼마나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따라서 왕자님을 동경하면서도 혐오하는 모순된 감정은 어쩌면 태생적으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모순된 감정과 싸우고 타협하며 살아온 게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난 SO COOL 하게 살고 싶다. 구질구질하게 연명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것도 껍데기만 흉내 내는 가짜로 말고 진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① 우선 돈이 압도적으로 많아야 한다. 내가 오늘 당장 일을 안 해도 아무 상관없는 건 당연하거니와, 그런데도 타인에게 굴욕감을 줄 정도로 압도적인 부가 필요하다. 물론 돈이 없어도, 일을 안 해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린 지금 안분지족의 백수가 아니라 왕자님으로 사는 법을 다루고 있음을 감안하자.
② ①의 부를 최대한 어린 나이에 갖고 있어야 좀 더 COOL 할 수 있다. 같은 부를 가지고 있어도 젊을수록 상대적 가치가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죽으면 그 돈이 다 무슨 소용이야!
③ 잘생기면 금상첨화다. 물론 외모는 타고나는 거라고 하지만, 슬프게도 외모와 부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
④ 성격이나 인품이 좋으면 당연히 좋지. 그런데 사람들이 의외로 별로 관심이 없다. '착한' 건 돈 없는 나도 할 수 있으니까.
①②③을 보면 알겠지만, 드라마 남주의 SO COOL 한 멋짐의 비결은 그저 '잘 태어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남주의 힘은 그의 노력의 인정에서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갑질'이다. 빌런의 갑질과 다른 거라곤 내 편이냐 네 편이냐 차이밖에 없다.
그래서 난 왕자님을 혐오한다.
#3
킹더랜드 초반, 왕자님은 낙하산(!) 인사로 아버지의 회사 인턴으로 일한다. 마침 동료 인턴이 상사에게 부당한 갑질을 당한다. 여기서 멋있게 상사 앞을 막아선 왕자님. 상사는 "넌 뭐 하는 놈이야?"라는 대사를 날리고... 왕자님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에게 직접 보여준다. 그대와 나의 위계 차이를.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고 벌벌 기는 상사(사실 처음부터 상사가 아니었지...)를 뒤로하고 왕자님은 COOL 하게 사무실을 떠난다. 참! 왕자님은 COOL 하게 동료 인턴을 정직원으로 임명하는 따스함도 잊지 않는다.
이게 '사이다 명장면'이라고 유튜브에 광고되는 게 참 웃프다.
하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상사를 죽이고 싶은 마음 하나쯤 가지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사이다처럼 보이긴 하겠다. 하지만 인턴은 언젠가 반드시 상사가 된다. 인턴이든 상사든 왕자님의 손가락질 하나에 인생이 바뀌는 장면이 아직도 드라마에 나오는 걸 보며 눈물이 나온다. 그저 아비 잘 만난 게 다일 뿐인 어린놈에게 고개를 숙이며 상사는 집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 생각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갑질'하는 인물은 이름도 없는 빌런 따위가 아니라 바로 왕자님이다.
그래서 난 왕자님을 혐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