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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Jun 27. 2023

제왕절개술과 인류의 진화

#1

눅진한 공기가 기분 나쁜 어느 여름밤. 홀로 야간 당직을 서고 있었던 난 혼신의 바느질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후에 자연 진통으로 입원한 산모가 10시간 정도 진통 끝에 어찌어찌 출산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유달리 힘을 잘 주지 못해서 고생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산도가 너무 깊게 여러 곳으로 찢어져 출혈이 심했다.


질 안쪽을 꿰매야 하는 일이다. 안 그래도 좁은 동굴 같은 곳이라 바늘 들어가기도 어렵고 피가 계속 차올라 시야 확보도 안 된다. 게다가 질 안쪽 살은 매우 연해서 간신히 꿰맨 자리조차 찢어지기 쉽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출혈이 지속되어 산모는 사망. 피의 모래시계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총체적 난국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산부인과 의사를 해서 이런 험한 일을 겪나...'


그러나 이 시간에 의사라곤 나 혼자뿐이니 어떻게든 내가 해결해야 했다. 체감상 1시간은 꿰맸던 것 같다. 바느질하며 머릿속으론 꿈 많던 의대생 시절부터 인생의 주요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천신만고 끝에 어찌어찌 피는 멈췄다.


당직실로 돌아온 나는 진이 다 빠져 쓰러졌다. 항상 지나고 나서 드는 생각이지만, 또 해본다.


'아니 이렇게까지 산모랑 의사가 죽을 뻔한 고생 하면서 자연분만을 고집해야 하나? 제왕절개 했으면 벌써 10시간 전에 아기 낳고 병실 가서 쉬고 있을 데...'


최근 화제였던 자이언트 판다의 출산 장면이 생각났다. 무려 122kg 몸무게인 엄마 판다가 고생 끝에 낳은 새끼의 몸무게는 고작 '197g'이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몸집에 비해 너무 큰 태아를 임신하는 거다. 도대체 제왕절개술이 없던 시절엔 어떻게 애를 낳았던 걸까? 아마 목숨을 하늘에 맡겼겠지...


#2

2018년이었나? 교수님께서 흥미로운 논문이 있다며 지나가듯 소개해 주셨던 것이 기억난다. 논문의 주제는 "제왕절개술이 사람의 진화에 영향을 준다"였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논문을 이렇게 요약해 주셨다.


"제왕절개술이 도입된 뒤 요즘 여성이 자연분만밖에 없던 옛날 여성보다 골반이 작아졌다고 하네요."


당시 교수님께선 마치 여성의 골반이 제왕절개술을 염두에 두고 작아지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하지만, 진화론적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교수님의 설명은 과정이 생략되어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3

진화는 포K몬이나 디G몬처럼 단일 개체가 노오오오력! 해서 변화하는 게 아니다. 집단의 유전자 조성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제왕절개와 여성 골반의 변화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제왕절개술이 없던 시절엔 골반이 넓은 여성이 분만에 유리했고 생존율이 높았다. "옛날에 우린 밭 매다가 그냥 끙! 하고 애 낳곤 곧장 일하러 가곤 그랬어!"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들은 사실 살아남았기에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 골반이 좁은 여성은 대부분 출산하다 사망했기에 말이 없을 뿐. 따라서 당시 인구 집단은 골반 넓은 여성이 많고 골반 좁은 여성은 적었다.


그런데 제왕절개술이 도입되면서 골반이 좁은 여성도 출산으로 사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사망해서 사라졌을 좁은 골반 유전자가 본인도 살아남고 후손까지 남겨 두 배가 된 것이다. 게다가 미래에 또 다른 임신까지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획기적인 수술인가! 제왕절개술 덕분에 좁은 골반 여성은 자신의 좁은 골반 유전자를 후대에 널리 퍼뜨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누적되어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옛날에 비해 인구 집단에 좁은 골반 여성의 비율이 많이 증가하였다. 그것이 인류의 '진화'이다.


#4

비슷한 기전으로 제왕절개술이 태아의 출생 몸무게를 점차 증가시키는 쪽으로 영향을 준다는 주장도 있다. 야생에서 몸집이 큰 아기는 좀 더 튼튼해서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제왕절개가 없던 시절 너무 큰 태아는 산도를 통과하지 못해 산모와 함께 사망했기 때문에 마냥 큰 태아를 낳는 유전자는 도태되었다.


그런데 제왕절개술이 도입되어 큰 태아를 임신해도 사망하지 않게 되면서 해당 유전자가 후손에게 전달될 기회도 늘어났다.


#5

요약하자면 제왕절개술이 여성의 골반이 좁아지고 태아가 커지는 인류의 '진화 방향'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건 '제왕절개술이 안 좋다'는 반대 의견이 아니다. 그래도 제왕절개술은 해야지 않겠는가? 현대 의료로 살릴 수 있는 산모를 '자연도태' 되도록 만들 순 없으니까 말이다.


오늘 내가 바꾼 산모의 운명이 모여 인류 진화의 방향을 0.000001도 정도 바꿀 수 있다는 진화론에서 이과생은 보람과 낭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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