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날 동료 과장님과 점심을 먹는데, 과장님이 말했다.
"선생님은 개원 생각 없어요?"
과장님은 동료라고는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최소 10년은 더 많고 그만큼 병원에서 오래 일하셨다. 본인은 어쩌다 보니 여기 안착해서 이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지만, 나는 개원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 승부수를 띄울 나이라고 하셨다.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조언이긴 하다. 그러나 지난번엔 "대학병원에 다시 돌아가실 생각은 없어요? 교수가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라고 물어보신 분이라 과장님의 질문 의도가 뭔지 잘 모르겠다. 왜냐면 교수와 개업 의사는 적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한두 번이야 모르겠지만, 자꾸 듣다 보니 마치 날 병원에서 내보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성공하든 말든 관심 없고 대학병원으로 돌아가거나, 개업이라도 해서 알아서 여기서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 나이 먹고도 내 적성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학생들 가르치는 거 좋아하고 환자 진료하는 건 좋아하지만, 머리 빠지게 연구하는 건 못하겠다. 그렇다고 개업하는 건 두렵다. '사업'이란 두 글자에서 난 아버지를 떠올린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래도 성공해 보겠다고 개인 사업하다 빚만 지고 망한 아버지. 그의 침몰은 내게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개업한 선배 의사 말로는 많은 개인 사업 중에 그나마 병원 개업이 가장 쉬운 거라고 하지만, 난 영 그렇겐 못 살겠다 싶다. 그래서 이런 내겐 월급쟁이 의사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당히 과장님께 둘러대며 여쭤보았다.
"아 근데 전 돈이 부담스러워서... 개원하려면 대충 얼마 정도 있어야 할까요?"
그는 젓가락질하며 무심히 대답했다.
"쌤은 남자라 여자 산부인과 의사처럼 외래만 보는 작은 의원으로 개업할 수 없죠. 빌딩 하나 빌려서 분만하는 병원으로 개원해야 하는데, 한 ○○억 정도 들 걸요?"
"네!? ○○억이요? 그건 너무 돈이 많이 드는데요..."
과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빚내서 개원해야 은퇴 나이까지 쉴 틈 없이 은행에 갚죠. 너무 나이 들고 개원하면 힘들어서 오래 못 살아요."
○○억이라니. 너무 막막한 숫자여서 지금은 얼마라고 그러셨는지조차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내가 과장님의 말씀을 듣고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병원장님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와 남은 의사 인생을 허덕이며 ○○억 갚다가 죽으면 그 돈 버는 게 정말 좋다고 할 수 있는가?'였다. 심지어 그 빚 갚는 것도 의료소송에 걸리는 일 하나 없고 오로지 순탄하게 번다는 가정 하 아닌가. 그것도 '분만' 병원이 말이다.
난 정말 개원할 팔자는 안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늘 막연한 걱정을 달고 산다. 내가 과연 언제까지 의사로 일할 수 있을까 하고. 나이가 들어도 월급 받고 살 수 있을까?
#2
성형외과 선배나 친구를 보면 같은 의사가 봐도 정말 어마어마하게 산다. 돈도 어마어마하게 버는데, 소송도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한다. 나는 진상 손님 하나 만나도 밤에 잠이 안 오는데, 그 동네는 그냥 소송이 일상이란다. 미용을 다루는 만큼 크고 작은 불만족 같은 게 얼마나 많겠는가. 당연하다는 듯이 소송 안 걸려 있는 병원이 없고 합의금이 그저 유지 비용같이 나간다고 하는데, 난 얘기만 들어도 무서워서 못 하겠다 싶었다. 거기다 건물 임대료에 광고료까지... 그래서 결국 '순수익'이 얼마일지 궁금하다.
최근 강남에 성형외과 개원하는 선배를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말했다.
"빚은 내시긴 해도 그 강남에 개원하시다니. 전 그저 너무 부럽습니다."
그러자 선배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내가 현타 오는 얘기 해줄까?"
"네 뭔데요?"
"내가 개업한 의원 있는 메디컬 빌딩 말인데, 임대 계약하러 갔더니 그 건물 주인이 몇 살인 줄 알아? 중고딩이야! 중고딩!"
"헉!"
"미성년자라 단독으로 계약 못 해서 부모님이 와서 계약했다니깐? 성형외과 개원해서 ㅈ빠지게 벌어 강남에 빌딩 하나 살 수 있나? 그걸 어린애가 이미 갖고 있어요. 그걸 보며 내가 지금까지 해온 건 도대체 뭐였나 싶더라."
"..."
그날따라 강남역 2호선 지하철은 사람이 유독 많았고 집에 가는 길은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