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후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남겨본다.
지금은 나도 동네 병원 의사니까 '후배'라고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땐 '교수와 실습 학생' 관계였다. 산부인과 병원 실습 때 적극적인 태도로 인상이 좋았기에, 그녀가 2년 뒤 인턴으로 돌아왔을 때 산부인과로 영입하기 위한 권유를 많이 했었다. '여자' 의사이기도 했고. 솔직히 우리 병원 산부인과에선 남자 의사가 나 이후로 전멸이라 교수님들이 남자 인턴 선생님에겐 말씀도 안 하신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교수님이 좋게 보실 정도로 훌륭한 인재라면 남들이 꺼리는 산부인과를 전공하라고 권유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그녀에게도 야망이 있을 게 아닌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자 의사가 하기에 산부인과가 괜찮다"라고 말하면서도 난 내심 양심의 가책을 느끼곤 했다. 나조차도 "산부인과를 전공하는 게 과연 최선이었나. '의외로 할만하다'라고 자기 암시를 걸며 사는 게 아닐까"라고 매일 번뇌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교수님의 기대나 나의 걱정은 쓸데없는 거였다. 그녀는 인턴 수련을 마치고 전공과 결정 없이 대학병원을 퇴사했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급하게 전공과를 결정하지 않고 1년을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한 것이다. 물론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남자 선생님은 군 문제 때문에 '그냥 쉰다'라는 선택권 자체가 없다. 난 그녀를 보며 여러모로 부러움을 느꼈다. 어수선하고 불안한 와중에 정신없이 운명에 휩쓸리기만 했던 나의 인턴 시절을 추억하면서 말이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이 아쉬운 이에겐 '미정'이라는 가능성이 부럽게 느껴지는 법이다.
#2
1년 뒤 후배는 대학병원으로 돌아와 산부인과 전공의로 지원했다. 우린 '면접관과 면접자'로 다시 만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로컬 피부미용의원에 취직해서 일했다고 했다.
피부과 전문의가 아닌 의사 선생님이 개원하는 미용 의원. 요즘은 프랜차이즈화되어서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많이 퍼져있는 의원이다. 도대체 여기가 미용실인지 병원인지 의사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그런 곳. 대학병원에선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어차피 일반의 신분으론 일할 수 있는 곳도 한정되어 있으니, 후배는 거기서 일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보톡스 좀 많이 배웠니? 나도 좀 가르쳐주렴"
면접이라는 자리 관계상 인사치레로 물어본 거였지만, 아주 진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후배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레이저도 하고 보톡스, 필러도 했습니다. 배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요. 인턴만 하고 나온 저도 금방 배우고 바로 현장 투입되었는데, 교수님은 임상 경험도 많으시니까 더 빨리 배우실 거예요."
"하하하. 그렇구나... 그럼, 나중에 시간 한번 내보자. 나도 요즘 이마 주름이 짙어지는 것 같은데 여기 보톡스 좀 놔주고"
전공의 한 명이라도 소중한 산부인과인지라 어차피 탈락자가 없는 면접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면접은 끝났다.
후배는 교수님이 농담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으나, 강호의 미용 기술(그것이 정파인지 사파인지는 모르겠지만)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산부인과 전공의는 너무 바빴고 나 또한 나름으로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결국 내가 먼저 퇴사하게 되었다. 퍽 아쉬운 일이다.
#3
삶을 이어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의사가 되는 것도 또 다른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 감사하게도 지금 난 전공을 살려 산부인과로 일하고 있지만, 고용 안정성은 전혀 없다. 과연 내년에도 내가 산부인과 의사로 취직해 있을지는 나도 전혀 알 수 없다. 솔직히 남자 산부인과 의사는 인기가 별로 없어서 영 불안하다.
직장인에겐 '어차피 대기업에 입사해도 나중엔 대부분 요식업(?)으로 빠진다'라는 자조적인 농담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사 면허가 '철밥통 면허'라며 부러워하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면허가 있으니 일할 수 있다'와 '누가 일거리를 계속 준대?'는 역시 다른 문제다. 따라서 많은 의사가 저마다 다양하고 복잡한 사정으로 피부미용 업계로 빠진다.
내 느낌엔 '직장인이 생각하는 요식업계'와 '의사가 생각하는 피부미용 업계'가 거의 비슷하게 대응하는 것 같다. 지금 직장이 힘들고 미래 보장이 안 될 때 생각나는 것도 똑같고, 너도나도 뛰어들어 시장이 과포화 상태라는 것도 똑같고, 따라서 망하는 곳도 많다는 것마저 똑같다. 요식업이 절대 만만하지 않은 것처럼 피부미용의원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돈'을 쫓아서 할 수만은 없는 심오한 전쟁터일 터. 그러나 그런 전쟁터보다 바이탈 과가 상황이 더 열악해서 능력 있는 의사들이 빠져나간다는 현실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