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사는 왜 돈을 많이 버나?"
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든다. 의사만큼 버는 (혹은 더 많이 벌기도 하는) 직장이 많아진 현시대에선 다소 억울하기까지 하다. 아무튼, 이에 대해선 다음에 얘기해 보기로 하고, 이번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2
최근 지방법원의 어떤 판결을 보며 난 '이래도 산부인과 의사 할 거야?'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건은 이러했다.
2016년에 있었던 일이다.
유도분만 예정일 하루 전 산모는 진통을 느꼈고, 같은 날 오후 6~7시부터 태동이 평소보다 줄어드는 느낌이 들어 오후 10시 30분경 병원에 전화 문의를 했다. 병원은 산모에게 태동검사를 위해 내원하라고 했고 산모는 오후 11시 30분에 병원에 도착했다.
태동검사는 태아의 심박동수와 자궁수축을 확인하는 검사이다. 병원 간호사는 오후 11시 39분에 태동검사와 내진을 했고 특이 이상은 없었다. 내진상 자궁문이 열려 분만을 위한 입원 준비(관장 등)를 위해 태동검사를 잠시 중단했다. 그리고 다음 날 00시 4분에 태동검사를 재개한다. 30분여의 공백이 있었지만, 재개한 태동검사에서도 태아 심박동수는 분당 155회로 정상 범위였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여기까진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새벽 1시경, 간호사는 태동검사에서 태아의 심박동수가 분당 80~90회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의사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의사는 새벽 1시 12분에 분만실에 와서 산모와 태아의 상태를 확인 후 응급 제왕절개술을 실시하기로 했다.
1시 25분경 제왕절개 시작, 1시 33분경 아기가 나왔다.
새벽 1시에 수술 결정 후 13분 만에 실시하는 건 대학병원도 하기 힘들 정도로 이례적인 속도이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보기엔 정말 대단하다고 할 정도로 의사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신생아는 출생 직후 양수의 태변 착색이 매우 심했고, 호흡과 심박동이 없었다. 병원 의료진은 소생술을 실시하여 신생아의 생명은 구했으나, 안타깝게도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아이는 뇌병변 1급의 장애 후유증이 발생하였다.
신생아의 부모는 의료진의 과실로 신생아가 영구적인 장애를 입게 되었다고 병원 측에 소송을 걸었다.
#3
태어난 아기의 장애와 부모의 아픈 마음은 감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법은 도덕이 아니며, 소송의 결과는 '배상액'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사람의 생명 같은 무형의 가치도 법으로는 다 값어치가 매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감정은 내려놓고 가격 산출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
① 일실수입
우선 객관적으로 따지기 쉬운 가치는 사람이 다쳐 일할 수 없을 때 생기는 금전적인 손해이다. 나의 존재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 게 '급여'라는 건 기분이 다소 오묘하지만, 합리적인 계산이다. 다만, 이를 전부 보상하진 않고 신체 손상의 정도에 따른 비율을 적용한다. 사망은 일을 전혀 할 수 없으므로 100% 적용이다. 아마 뇌성마비도 100%일 것이다. 위 사례 같은 경우 보통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신생아가 성인(19세)이 되는 순간부터 가동종료일(60세)까지)
X
(매월 22일)
X
(도시 노동자의 평균 일급; 신생아이므로)
X
(뇌성마비이므로 일할 수 없으니 100% 적용)
② 치료비 및 보조구 비용
신생아는 뇌성마비로 평생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정상적으로 태어났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병원 치료비도 보상해야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우선 이미 발생한 치료비는 나온 금액대로 보상한다. 여기에 향후 발생할 치료비를 계산하여 보상한다.
(연 치료비 및 보조구 비용 계산은 전문가에게 의뢰)
X
(평균 기대 수명;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름)
③ 개호비
보호자가 환자를 간병하며 발생하는 비용 또한 손해이므로 보상해야 한다.
이미 발생한 간병비는 나온 금액대로 보상한다. 여기에 향후 발생할 간병비를 계산하여 보상한다.
(간병비 계산은 손상 정도에 따라 다름)
X
(평균 기대 수명;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대략 ①+②+③을 계산한 금액이 16억 4767만 원이었다. 법원은 여기서 의사의 책임을 70%로 제한하였다. 문제 발생 후 처치가 매우 신속했고 의사가 최선을 다했던 부분은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계산된 금액은 11억 7226만 원.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신생아와 부모 2인에 대한 위자료 각 1억 원이 추가된다. 그리하여 의사에게 최종 선고된 배상액은 14억 7226만 원이었다.
#4
14억 7226만 원... 갚아나갈 이자를 생각해 편의상 15억이라고 하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15억으로 환아와 부모에게 어찌 위로가 되겠는가. 환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은 기본이다. 다만, 15억은 의사에게도 엄청난 금액임은 분명하다.
만약 의사의 급여가 월 천만 원이면 (편의상 세금은 제외) 10년을 꼬박 일하며 돈 한 푼 안 써도 15억을 갚을 수가 없다. 의사가 아무리 전문직이어도 평생 일하는 거 아니다. 전문의로서 본격적으로 일하는 나이는 30대 후반이며 60대 중반부턴 힘들어서 은퇴한다. 전성기는 대략 30년이라고 봐야 한다. 늦게 의사가 될수록 이 기간은 더 짧아진다. 1번의 사고로 30년 중 10년 이상을 속죄의 빚을 갚으라는 것인데, 문제는 그 기간도 '무사고'일 거라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제대로 일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만약 위와 같은 사고가 2번 발생한다면 그 의사는 죽지 못해 사는 거와 같다.
의사가 왜 고소득 직종이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고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만, 고액의 배상 책임이 따르는 직업인 만큼 의사의 수입은 '위험수당' 측면으로 볼 수 있다.
#5
위 사례의 15억 판결이 의사에게 불합리한 계산을 한 건 아니다. 그저 기존대로 계산했는데, 사건의 특수성으로 금액이 엄청나게 나왔을 뿐. 다만, 산부인과 의사로서는 씁쓸하다. 몇 가지 생각을 해본다.
첫째, 이제 산부인과와 소아과 의사는 정말 아무도 안 한다.
배상액의 계산식을 보면 알겠지만, 환자의 나이가 중요하다. 60세 이상의 환자는 심지어 사망해도 일실수입이 없으며, 기대 수명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치료비 및 개호비 보상마저도 적어진다. 그렇게 따지면 소아 환자를 진료하는 건 미친 짓이며, 젊은 산모와 0살조차 안 되는 태아를 진료하는 산부인과 의사는 그야말로 지뢰밭에서 뒹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둘째, 신생아의 생명을 살린 것이 더 손해가 되는 모순.
위 사례에서 만약 신생아가 사망했다면 치료비 및 개호비가 들지 않으므로 일실수입 100%만 손해 배상액으로 계산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긴박하게 소생술을 실시했던 의사로선 정말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법적으로 뇌성마비는 사망보다 더 큰 손해인가...
#6
요즘 필수과를 하는 의사가 부족하다고 난리다. 돈만 밝히는 의사 놈들이라 그렇다고 수험생의 의대 쏠림 현상부터 안 좋게 보던데, 글쎄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생각하는 거 아닐까? 열심히 노력한 만큼 인정받고 잘 살고 싶다. 그렇기에 '위기관리'를 하는 것이다.
옛날보다 정보가 많아져서 그런지 학생들이 매우 똑똑하고 세상 물정을 일찍 깨닫는 것 같다. 이상보단 실리를 추구하는 경향도 강해졌다. 삶이 그만큼 팍팍해졌다는 방증일까? 아무리 흉부외과가 멋있어도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의대생이 유달리 이기적이라 필수과를 지원 안 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위 사례를 봤을 땐 필수과를 살리기 위해선 의사 개인을 탓하기보단 좀 더 시스템적인 안정망 구축을 연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아직 먼 일... 당분간 필수과 의사의 몰락과 부족은 지속될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인 나는 그저 저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길 매일 기도하며, 오늘도 병원 당직 근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