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뿐 아니라 각종 잡일까지 싸고 쉽게 부릴 수 있는 노예였던 전공의가 사라지자, 대학병원은 이를 대체할 인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간호사를 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업무 영역이 아예 다른 건 둘째치고 일단 노동 의식 자체가 호구 전공의보다 훨씬 높아 일을 시키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남아있는 전문의를 갈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학병원 전문의는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고 (그들은 전공의만큼 젊지 않다) 소송 등 각종 위험을 떠안는 것도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 둘 중 하나가 되는 거다. 걸어서 떠나거나, 혹은 죽어서 떠나거나...
#2
일단 응급실부터 괴사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전문의들이 줄줄이 사직했다는 뉴스가 들리더니 어제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건너 건너 들은 바에 따르면 ○○병원 응급실 전문의의 대거 사직 배경은 꼭 전공의가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하고 내부 갈등 같은 것도 좀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 그 많은 응급의학과 '교수'라는 의사들의 신분 자체가 대부분 정교수가 아니고 1년 계약직일 뿐이기도 했고. 그렇게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굴렸는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그게 통하지 않게 된 것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훨씬 더 오래되고 곪아온 갈등이다.
#3
그래서 정부가 검토 중이라는 대책이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모르겠다.
① 일반의 채용 지원
이걸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사람은 도대체 눈치라는 게 있긴 한 건가 싶다. 돈만 주면 응급실을 나온 전공의가 다시 돌아간다는 거냐? 한번 상상을 해보자고. 옳든 그르든 자신의 신념으로 회사를 박차고 나왔는데, 고작 돈 몇 푼 주니 돌아간다고? 남들 눈치를 떠나서 스스로에게도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
② 난동 환자 진료 거부
일단 응급실 난동 환자를 처벌하는 법이 이미 있음에도 현장에선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얼마나 '난동'을 부려야 문제가 되는지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당장 경찰을 불러도 경찰은 "환자가 얼마나 절박하면 그랬겠냐?"면서 신고한 의료진을 나무라는 게 현실이다.
아무튼 그래서 진료 거부를 한다고 치자. 그럼 웃긴 상황이 되는 게 다음이다.
④ '뺑뺑이 환자' 강제 배정
진료 거부된 난동 환자가 얌전히 집에 갈 리가 없다. 즉, '뺑뺑이 환자'가 되어 결국 어디론가 강제 배정이 된다.
진료 지연에 따른 불가피한 피해를 면책해 준다는 것도 웃긴 것이 '진료 지연'은 시스템의 문제인데, 언제부터 정부가 눈감아주는 의사의 '죄'가 되었냐는 거다. 그리고 다른 피해를 면책해 준다는 것도 아니다.
#4
아무튼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라 급기야 9월 1일 '응급실 전문의 사직 금지명령'도 만지작거린다는 건데... 이제 4일밖에 안 남아서 고민하는 전문의는 빨리 입장을 결정해야 하게 생겼다. 탈출하려면 8월 중에 해야 한다는 거다.
말하자면 응급실이 붕괴할까 봐 우려해서 내놓는 대책들이 응급의학과 의사를 더욱 실망하게 해 더 큰 붕괴를 초래하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 실현적 예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