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산 Sep 01. 2021

수술실 CCTV 의무 설치법이 통과했다

예로부터 흐르는 강물은 거스르지 말고 타는 거라고 했다


2022년 2월 추가 내용


제가 수술실 CCTV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이 2개가 있는데, 유독 이 글만 검색되고 이전 글이 안 읽히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전 글을 좀 더 좋아하고 이 글은 (한문철TV 등을 예시로 든 것이) 지금 보면 좀 오글거리는 느낌인데, 의도와 다르게 맛은 이것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전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술실 CCTV 법이 영유아보육법과 신기하게도 많은 부분이 비슷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법이라는 게 아주 막무가내로 만들어지진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 그 명분 싸움이 예술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감상으로 적은 건데, 필력이 부족하여 잘 담기진 않았을 겁니다... ^^;


그래도 저는 이전 글 없이 이 글만으로는 반쪽짜리라 생각하므로 서두에 남겨 놓습니다.


(이하 원글 본문)



지난 글에 수술실 CCTV는 어차피 도입되니 의사는 차라리 적극적으로 찬성하자는 의견을 남긴 바 있습니다.


사실 의사들 사이에서도 수술실 CCTV 의무 설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합니다. 적극 "찬성"하시는 분도 계시고, 자신만의 소신이 있는 "중립"을 취하는 분도 계시고, 자포자기적 "방치" 입장을 취하는 분도 계시고, 합리적인 우려로 "반대"하시는 분도 계시고, 그저 "아무 생각이 없는" 분도 계십니다. 의사라고 무조건 반대하시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의협은 의협으로서 할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 욕 좀 그만 먹고 싶어요.


자 수술실 CCTV는 도입되었습니다. 나쁘지 않아요. 수술실 CCTV 도입이 필요한 이유는 너무나 피부에 잘 와닿잖아요. 굉장히 일차적인 자극이에요. 그에 비하면 의협이 말하는 "잠재적인" 우려들은 사실 좀 명분이 약하게 들리고요. 그리고 자세한 내용엔 관심이 없고 솔직히 그저 의사들이 반대한다고 하니깐 더 수술실 CCTV 도입을 찬성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런 증오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안타깝고 그저 속상합니다. 그분들은 (수술실 CCTV 의무설치 도입의 원흉이었던) "돈독 오른 일부" 성형외과들이 법이 통과되기 전부터 이미 "우리 병원 수술실엔 CCTV 설치되어 있습니다!"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환자들을 유인하고 있다는 걸 아실지는 모르겠어요. 설마 수술실 CCTV 설치의 도입이 적폐 의사 집단의 패배고 자신들의 승리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요?


아무튼, 수술실 CCTV 의무 설치법은 드디어 통과했어요. 그러니 노여움을 이제 잠시 내려놓으시고 한번 여유 있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시다. 모든 수술실에 CCTV가 설치되면 어떤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질지 말이에요. 대비는 못하더라도 어쨌든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하니깐요.




#1 원래 그러라고 만든 민식이법이 아닌데


2019년 12월 24일 개정된 도로교통법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명 '민식이법'. 저는 수술실 CCTV 설치법이 도입되기까지 그 입법 계기와 논란 과정 등을 보면 민식이법이 떠오르곤 합니다.


어린이 보호구역 건널목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아이가 사망한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 비록 시시비비는 논란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엔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표에 굶주린 정치인들의 침샘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했죠. "아니 그래도 법을 그렇게 만들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감성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법의 취지는 선함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엔 정말 상식을 초월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결국 좋은 의도가 무색하게 (우려했던) '민식이법 놀이'로 요약되는 또 다른 갈등과 혼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수술방 CCTV 의무화는 과연 어떻게 흘러갈까요.




#2 수술실 CCTV와 한문철TV


수술실 CCTV 의무 설치법을 보면서 제가 든 (허튼) 생각 중 하나는 '한문철TV같은 의료 유튜브 하나 나오겠다'였습니다.


의협은 주장합니다. 수술실 CCTV가 설치되면 환자와 의료인 간의 불신을 조장한다고요. 그런데 솔직히 이게 별로 직접적으로 잘 와닿지 않습니다.


찬성하는 쪽은 말합니다. "나 수술했는데 궁금하니 보여주세요~"라고 했을 때 보여 주는 법안이 아니라고요. 의료사고 발생 시에만 보게 되는 블랙박스가 될 거라는 겁니다.


글쎄요...


지금도 말이죠. 의료사고가 아니어도 활자로 된 의료기록을 '그냥' 복사해 가는 환자분들은 있습니다. 그냥을 그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건 저도 의도를 잘 몰라서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분위기 좋았고 잘못한 게 없는데 왜?'라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찜찜할 때가 있지요. 의도를 알 수 없으니 그냥 '궁금하신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근데 영상이라고 다를까요? 받은 나의 수술 동영상을 '그냥' 프레임 단위로 확인해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저 그냥요.


유튜브 채널 한문철TV는 시청자들이 보내준 블랙박스 영상을 보고 과실 몇 대 몇 답변을 해주는 방송입니다. 한문철 변호사님 자신도 논란이 있긴 해도 어쨌든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건 맞습니다. 저는 분명 이런 채널이 의료계에서 등장할 거로 생각합니다. 법조인 혹 의료인, 아니면 둘이 합쳐서요. 편의상 '남산TV'라고 해봅시다.


남산TV는 응급 수술을 하다가 의료분쟁에 휘말린 뒤 수술실 CCTV를 통해 조목조목 100% 완벽한 처치를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받고 실업자가 된 산부인과 의사 남산이 최근 개설한 유튜브 채널입니다. 늘그막에 오갈 곳이 없어진 남산은 유튜브를 하나 개설해서 시청자들이 보내준 수술실 CCTV 동영상을 분석해주며 먹고 삽니다. 처음엔 남산도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자기가 수술받는 영상을 남한테 보내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어라? 세상엔 생각보다 상식을 뛰어넘는 분들이 많았던 겁니다. 남산은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여 제보자가 궁금해할 내용을 말해줍니다. 약간의 양념은 옵션이에요.


"아~ 지혈 시간이 너무 긴데요~ 잘 보이진 않지만~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습니다~"


"아~ 이쯤 되면 이미 OO는 적출되어야 할 타이밍인데요~"


사실 결과적으로 수술이 별 탈 없이 끝났던 제보자도 남산TV의 집요한 분석을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의료 사고' 같아 병원에 따져야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역시 남산TV가 아니었으면 어쩔뻔했냐면서요. 참의사 남산TV !


의사들은 수술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매 수술이 똑같을 순 없으며 항상 돌발상황은 발생할 수 있다고 남산TV를 비판해도 남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뭔가 뒤가 구린 구석이 있으니깐 남산을 깎아내린다고 하면서요. 이렇게 남산TV는 승승장구합니다.


어느 날 노랑 딱지가 붙기 전까지는요.




#3 한문철이 이런 거 조심하라고 그랬어


대부분의 외과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묵묵히 본인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사실 그런 성격의 분들만이 외과에 "남아" 있는 거죠. 외과의는 특유의 외과 부심으로 삽니다.


그런데 정말 만약에 말인데요,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로 너무 이상한 컴플레인이 많아지면 그분들도 결국은 지칠지도 몰라서 우려됩니다. 어느 날 수술을 하시면서 보조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남산이 이런 거 조심하라고 그랬어. 여기서 이걸 좀 더 제거해주는 게 도움이 된다고 무리하면 꼭... 그렇지 피가 많이 나서 나중에 의료 '사고' 아니냐고 시달리게 된다고. 열심히 봐야 해 남산TV."


라고 하면서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런데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모험을 해야 할 때가 분명 찾아옵니다.


극적인 설정을 해봅시다. 응급 환자가 왔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아무래도 수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해도 살 가능성이 5%밖에 안 된대요. 그래도 의사는 그 5%의 가능성이라도 포기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의사의 머릿속에 문득 짜라란~ 남산TV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내 손을 붙잡고 어떻게든 해달라고 하는 보호자가 퇴원할 땐 수술실 CCTV를 100% 복사해갈 것 같습니다. 순간적이지만 95%의 '자연사 (?)' 시나리오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뭐하러 무리하는가 하고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자기 자신에게 자괴감이 듭니다.


남산TV가 의사는 수술할 때 이런 거 조심하라고 그랬어...




#4 기왕 CCTV를 도입했으니 의사도 보호해줘야 한다. 의사가 예뻐서가 아니라 환자를 위해서


저의 망상 재미있게 보셨는지요? 설마 그런 일이 생기겠어요?


상상해보니까 말이죠.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네요. 수술실 CCTV를 의무화하겠다는 건 이젠 외과의에게 정말 한 치의 오차마저 봐주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우려가 있다는 거죠. 정말 프레임 단위로 영상 리뷰하는 손님 나온다니까요? 안 그럴 거 같으세요? 배달의민족 리뷰만 봐도 잠재적으로 그럴 것 같은 손님들 많던데... 그런데 실제 수술이라는 게 100% 완벽할 수만은 없고 의사도 신은 아니지요. 여기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도 언젠가는 한번 하게 될 것 같아요. 뭔가 문제가 몇 번 터지고 나서야 말이죠.




요즘 실습 학생들을 보면 도통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저도 학생 땐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학생들에게 강의하다 문득 펜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얘들아. 공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거에 무관심하면 안 된단다. 수술실 CCTV 의무 설치법이 통과한 건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게 그냥 의사가 싫어서 통과된 것 같지? 아니란다."


"..."


"앞으론 어떻게 될 것 같니? 사실 대부분은 별문제 없을 것 같아. 나만 잘하면 될 문제이지 않니? 정말 그럴까?"


"..."


정말 똑똑한 애들은 맞는 것 같은데, 자기 의견을 선뜻 말하는 학생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에요.


"그러면 말이야... 여러분은 산부인과 하고 싶어요?"


"..."


역시나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학생들에겐 별 기대도 안 하긴 하지만, 앞으로 기피 수술과는 더 찬밥신세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음... 좀 시원섭섭하네요. 그래도 누군가는 외과 하실 거니깐 설마 나중엔 외과의가 없어서 수술 못 받는 일은 없겠죠?


... 그렇겠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