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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시언 Mar 17. 2020

내 학창시절의 알바 이야기

나는 중학생 때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자주 했었다. 아파트 단지나 동네에 있는 집집마다 전단지를 붙이거나 던져놓고 오는게 전부인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었다.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공부에 관심없는 중학생에겐 남는게 시간이니까. 


요즘에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보통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아는 형이나 친구의 아는 형이 소개해주는 형식이었다. 즉, 가게 주인 → A라는 사람 → B라는 사람 → C라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오는 형태였다. 이건 나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하청에 하청에 하청인 셈이다. 당연히 돈은 쥐꼬리만큼으로 줄어들었지만 그 당시엔 이런 구조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게 당연한건줄 알고 그냥 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효율적으로 전단지를 배포하는 방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으로 간 다음 내려오면서 뿌리는 것이다. 올라가면서 나눠주는것보다 체력을 절약할 수 있고 아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이건 내가 발견한게 아니라 나보다 더 경험있던 친구가 알려주었다. 전단지 아르바이트에도 효율을 추구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나는 아르바이트하고 받은 돈으로 분식집에서 라면에 김밥을 먹었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만두라도 있는 날에는 행복 그 자체였다. 공부 대신 다른걸 했던 것이 후회된 적도 있지만, 여러가지 경험들이 지금껏 알게 모르게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느낀다. 



고등학생 때에는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고깃집 아르바이트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숯에 불을 붙이는 일이 있었고(소위 불맨이라고 불렀다), 서빙이 있었는데 나는 불맨하다가 사장님에게 여러번 욕먹고 서빙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 밥먹을 때 마다 고기를 주는줄 알았건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된장찌개랑 나물이 끝. 밤늦게까지 혹은 새벽까지 일하는 날에는 너무 배가 고파서 손님들이 먹다 남긴 차갑게 식어빠진 고기를 주워먹곤 했었다. 나중에 알게된 바로는, 이게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아르바이트 학생들도 알게 모르게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 


고깃집에서는 돈을 주급으로 받았었는데 지금 기억으로 당시 시급이 1800원이었나 1600원이었나 그랬던 것 같다. 당시엔 청소년이 아르바이트를 하는게 일반적이지 않은 분위기였고 주로 급하게 돈이 필요하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는 문화가 있었다.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에선 그랬다. 학교에선 꾸벅꾸벅 졸거나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저녁부터 밤까지 일하는 생활을 꽤 했다. 농구를 좋아해서 점심 시간의 90%를 친구들과 농구하는데 쓰고 점심을 대충 혹은 마지막에 엄청 빨리 먹는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살땐 구미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했었다.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모르는 사람이랑도 방을 쓰고, 완벽하게 회사라는 곳에서 일을 했었다. 기본급이 있다는걸 그때 처음 알았고 급여명세표라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봤다. 공장에 취직했을 때 컴퓨터 자격증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자격증 때문에 공정에 들어가지 않고 품질관리팀(당시에 QC라고 불렀다)에 들어가서 2교대로 일했다. 당시에 만났던 전국에서 모인 친구들은 요즘에 전국 각지에서 나름대로 잘 사는 것 같다. 


내신을 믿고 사범대에 지원했다가 후보 1번으로 떨어졌다. 원래 꿈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사범대에 가려고 했던 것인데 보기 좋게 떨어져서 낭패였고 결국 마구잡이로 원하는 대학이 아닌 곳에 가야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처럼 잘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생때에는 대학교 전산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여기서 하는 일은 고장난 컴퓨터를 수리하거나 운영체제를 새로 깔아주는 것들 이었는데, 알바생이서 그런진 몰라도 뭔가 앉아서 하는 일보다는 몸쓰는 일이 많았다. 창고 정리라던가 컴퓨터 본체나 모니터를 나르는 일을 자주 했다. 당시에 무거운 컴퓨터나 모니터를 많이 들고 다녀서 허리가 많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용돈도 벌었고 일 자체가 어렵진 않아서 오래도록 했다. 원래 여긴 아르바이트가 없는데, 학교에서 알바하고 싶다고 교수님께 조르고 졸라서 겨우 할 수 있었다. 수업이 공강일 때 등 시간표에 맞춰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생활을 알차게 보내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일도 했었지만, 예쁘고 착한 애인도 만나서 연애도 했었고 장학금도 타서 등록금을 아끼는것도 할 수 있었다. 좋은 친구들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았다. 


요즘 재테크 유튜브 영상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학갈빠엔 일해서 돈 모은 다음 투자하는게 백배 낫다는 이야이가 많은데 나는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공부만 한다면 그럴지 모르겠으나 대학에서 접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가지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쌓을 수 있는 추억들은 돈으로는 못사기 때문이다. 아련한 추억 한 조각조차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내 학창시절의 추억은, 특히 대학시절의 추억은 대체로 핑크색이다. 


술 먹을 돈을 아끼고자 친구의 휴대전화로 이성의 번호를 대신 따주고 술을 얻어먹는다거나(물론 단 한번도 그 이성과 그 친구는 잘된적이 없다. 당연하지 않나?), 여자친구의 친구를 누군가에게 소개시켜주면서 밥을 얻어먹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전술을 구사해서 지갑은 얇았지만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한 패턴을 만들기도 했다.


친구들은 용돈을 펑펑 쓰는데 나는 공부와 일을 병행하다보니 억울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워 여러차례 울었다. 대학생때의 아르바이트는 시간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대신 일을 한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럴때면 너무 배가 고파서 시간이 엄청 느리게 갔다. 살이 찔래야 찔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당시의 내 몸무게는 60kg 정도였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나는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걸 어렴풋하게 느꼈고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다짐같은게 가슴 속에서 스물스물 올라왔다.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고 뭘해야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몰랐다. 무작정 공부만하면 되는줄 알았건만, 천천히 생각해보니 공부외에 뭔가를 추가로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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