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는 어떤 운명적 시나리오에서 거친 삶을 받아들인다
유치원을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교에 첫 등교를 해야할 날이 왔다. 소심하고 자신감없는 성격을 타고난 아이는 학교에 가는게 몹시 싫었다. 무서웠다. 익숙하고 아늑한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의 두려움, 모르는 것에 대한 막연함,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압박,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한다는 사실로 인해 떼를 썼다. 울고 불고 난리를 피워도 학교엔 가야한다며 기어코 나를 등에 업고 교실까지 들여보냈다. 당시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는데, 눈물 콧물로 뒤범벅된 얼굴로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가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상당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때 내가 왜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썼는지는 정확하지않다. 아마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방구석에 틀어박힌 외톨이가 좋았다. 집은 아늑했고 울타리를 벗어나면 내가 모르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있는 정글일테니까. 태생이 자신감이 없었으니 이건 내 잘못이 절대 아니다. 외할머니는 교실까지 나를 업고가는 것으로 모자라 교실 안에 있는 책상에 앉히는 것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유유히 떠났다. 나의 작은 사회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국민학교에서 나는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공부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운동장에서 하염없이 그네를 타거나 송충이를 막대기로 괴롭히는 일은 재미있었다. 200원을 들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불량식품을 사먹고 BB탄을 주워 필통 축구를 하는 것도 소소한 놀이였다. 짧은 학교 수업을 마치면 누구는 학원으로, 누구는 집으로, 누구는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주로 노는 쪽이었다. 학교와 집 근처에 사는 친구들의 집에 놀러가거나 함께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지금 생각하면 진짜 말도 안되는 이상한 시간때우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의 한 반에는 약 4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다른 곳과 비교하면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학교는 나의 새로운 '해야할 일'이었고 유능하고 뼛 속 깊이 착한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40명의 새로운 친구들이 무섭고 새로운 환경이 두려워 학교 가기 싫다고 떼 쓰던 8살짜리 꼬마는 20년 뒤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처음 보는 수백명 앞에서의 강연을 밥 먹듯이 하고 스쿠버다이빙이나 패러글라이딩같은 액티비티를 즐긴다. 해외여행도 서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태생부터 자신감없던 아이는 자신감으로 똘똘뭉쳐 유일한 보물이 자신감인 성인으로 성장했다.
사람은 환경과 생각의 여하에 따라 이렇게 바뀔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렵고 무서운 많은 도전들이 눈 앞에 존재한다. 설레이면서도 두려운 상황에서의 선택이야말로 그 사람을 설명하는 증거가 된다. 나는 자유롭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기에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자유'다. 옛날 비디오에 나오던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이 사회에서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태생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니라 '태생이 이러니 바꿔보자'는 식이었다. 이런 의향은 나를 단기간에 압축성장하게 만들고 자본주의에서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나는 바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이 바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한글을 배우는 것도 남들보다 느렸던 아이는 어느새 작가가 됐다.
학교생활을 능수능란하게 하지 못한다고해서 사회에서 실패하는건 절대 아니다. 학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작은 사회지만 작은 것과 큰 것은 완전히 다르다. 학교 공부에 관심이 없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를 신념을 갖고 할 수 있다면, 수요는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겁 많던 아이. 세상을 보는 눈이 남들과 달랐던 눈물쟁이. 입학식 날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8살짜리 꼬마는 어떤 운명적 시나리오에서 거친 삶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