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폴 오스터
폴 오스터가 작년에 죽고 나서 그의 대부분의 저작을 소개한 열린책들이 아니라 교보문고 임프린트인 북다에서 <환상의 책>과 <어둠 속의 남자>가 재번역되어 올해 출간되었다.
나는 폴 오스터 초기 독자로 90년대 그의 초기 대표작을 읽으며 영문학, 영미 소설 읽기를 시작했던 경험이 있어서, 나름 각별한 작가이다. <뉴욕 3부작>을 포함해, <리바이어던>, <우연의 음악>, <문팰리스>, 그의 산문집인 <굶기의 예술> 아버지에 관한 책인 <고독의 발명>, <빵 굽는 타자기>, <공중곡예사>, <스퀴즈 플레이> 등등
그가 영화 <스모크>의 각본을 쓰고 그 책이 나왔을 무렵, 영화를 봤던 기억은 있지만 원작인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읽지는 않았다. 이 시점 이후 오스터 독서는 중단되었고, 그 이후로도 2000년대 초반까지 그의 책은 계속 출간되었지만, 작년에 <4321>을 읽기 전까지 오스터를 다시 집어 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미문학에 대한 게이트 키퍼 같은 역할을 그가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니 "열린책들"의 90년대 후반 책들이 나에게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고,
폴 오스터는 대중문학과 순문학의 중간쯤에서 믿음직한 작가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독서 취향이 깊어짐에 따라 오스터는 점점 잊혔으며, 뭔가 식상한 작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랜만에 읽었던 <4321>을 보며, 그가 가지고 있었던 문학적 모티브와 세계관이 담뿍 담긴 선물세트와도 같아서 그의 추모에 맞춰 독서를 하며 애도했을 만큼, 지난 애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고,
엊그제 집어든 <환상의 책> 역시나, 그의 장점 아닌 장점을 잘 느낄 수 있었던 독서였다.
우연한 사고로 아내와 자식을 읽은 젊은 교수가 생의 열정을 우연한 대상(무성영화의 쇠퇴기에 등장한 한 배우)에 집착하게 되고 그의 출연작을 몽땅 찾아서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배우에게서 편지가 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흥미진진한 이 이야기는,
폴 오스터가 가상의 인물과 그 세계를 얼마만큼 실감 나게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며 묘사할 수 있는지 (이야기 속의 이야기 꾸며내기)를 십분 확인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무성 영화시대의 미학을 잘 표현해 주는 90년대 작가 특유의 학술적 담론에 탁월한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뭐랄까 지금 세대 작가들이 함부로 판단하거나 의도적으로 불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보이거나 아예 과감한 정치성을 드러내는 반면, 주된 스토리 외에 사변적인 요소들을 많이 걷어내는 쪽으로 쓰고 있다면,
폴 오스터 같은 세대의 작가들은 자신의 사변을 적극 이야기 속에 침투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습성-습관들이 예전의 나였다면 지루했을 요소이지만, 이번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했다고나 할까,
오스터는 그대로였지만, 내가 변한 듯하고, 그렇다고 <환상의 책>이 끝내주는 별점 5개짜리 책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지만, 충분히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초심자로서 소설이라는 방대한 바다를 유영할 때 든든한 버팀목-쉼터 중 하나로 폴 오스터 책을 추천한다면 손에 꼽힐만한 정도의 책으로는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번역자들도 일급 영미권 번역 품질이라 가독성도 좋고, 문장의 흐름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때로는 다소 괴팍해 보이긴 해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뭔가에 몰두하는 오스터식의 주인공들은 불면의 밤에 채널을 돌리다 얻어걸려 끝까지 보게 만드는 90년대 영화들의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