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사랑에 관한 것을 제외한 모든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 1996년작 <실크>는 아주 짧은 장편으로 독서 시간은 한 시간도 안될 분량이다. 치과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반정도 읽었으니,
소설은 19세기 중반 전염병에 걸려 누에고치 유충들이 죽어 나가는 프랑스 남부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신선한 누에알을 얻기 위해 대륙을 가로질러 멀리 '세계의 끝'인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이지만, 여행이 주제가 아니라, 떠남과 돌아옴의 시간 동안 변해가는 주인공과 아내, 그리고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어떤 감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뭐랄까 이탈리아판 파스칼 키냐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시적인 문체와 음악적인 리듬, 자극적인 오리엔탈리즘과 우화적인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국적인 소품이라 봐도 될 정도이다.
비단을 얻기 위한 고치를 찾으러 가는 여정과 그 여정동안 켜켜이 쌓인 하지 못했던 말, 해소되지 않았던 감정, 묵힌 욕망과 여행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한 어떤 아련함들이 이방인의 눈을 통해서 전개되고, 시간이 조금 많이 흐른 후, 비로소 알게 된 어떤 사실은 작은 탄식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주인공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조금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결말이 정해진듯한 내용이지만, 특유의 오락성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솜씨가 좋다.
하지만 나는 뭐랄까, 동양인 특유의 가느다란 눈이 아닌, 어린 소녀의 눈을 하고 있었다는 반복되는 묘사의 주인공인 그 일본 소녀의 이미지가 "그래서, 도대체, 왜?"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인지는 좀 의아하고, 뭐랄까 이 소설이 다소 짜쳐보이는 구실을 제공하는 듯했다. (특히 후반부 전복된 오리엔탈리즘을 향수하는 다소 전복된 욕망의 장치는 너무 우엑스럽다)
이렇듯 90년대식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은 뭔가 유통기한이 있는 것 아닐까?
제약된 자유, 타성, 마조히즘이라는 일그러진 관계에서 나오는 다소 변태적인 숭고함에게 마음을 빼앗기기엔 유라시아 횡단의 그 장대한 모험이, 90일간의 여정이 도대체 아깝지 않을까?
오래전에 봤더라면 뭔가 더 감상적인 말랑말랑한 기분이 되었을 테지만, 이 이야기는 작금의 21세기에는 좀 눈살 찌푸리게 하는 요소가 많은 그런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