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또는 고독의 통과의례

<아름다운 여름>, 체사레 파베세

by 사장님의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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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름>은 1949년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아름다운 여름>(아름다운 여름, 언덕 위의 악마, 고독한 여자들)이라는 3편의 단편집의 1부이다. 파베세는 이 소설집으로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상(스트레가상)을 받았고, 그해 8월 자살로 생을 마무리한다. 녹색광선의 이 책이 3부를 다 옮긴 게 아니라 조금 아쉽다. 예전에 청미래에서 나온 <아름다운 여름>은 두권 짜리였는데 지금은 절판이다.


<아름다운 여름>의 첫 문단은 늘 애잔하면서 짙은 향수를 풍긴다. 무더운 여름, 미울 듯 강렬하다가 사그러들어 시원하고 향기로운 저녁의 공기에 그 자리를 내어 주는 햇볕, 돌바닥 골목을 뛰어가는 신발소리, 가로등 불빛에 가려 어두운 얼굴, 고독한 여름과 모든 게 가능할 듯한 산뜻한 마음.


17살 소녀 지니아는 낮에는 부티크 점원으로 일하면서 저녁에는 야간일을 하는 오빠 세베리노에게 저녁을 차려준다. 오빠가 출근하고 나면 친구를 기다리거나 친구를 만나러 카페에 가거나, 기분 좋은 저녁 산책을 다니며, 친구들에게 남자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자신에게 닥칠 남자와 사랑과 욕망의 놀이에 대해 몽상하기도 한다.


그녀에게 모델일을 하는 20살 아멜리아가 나타난다. 화가 앞에서 때로는 누드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는 아멜리아에게 강하게 끌린 지니아는 그녀를 따라가 화가를 구경하기도 하고 짐짓 포즈를 취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몸을 드러내는 포즈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아멜리아가 소개해준 젊은 화가 귀도를 만나고, 귀도와 같은 화가인 스페인 출신 로드리게스를 만나 그의 다락방 작업실에 자주 놀러 가게 되고, 지니아는 귀도와 차츰 시간을 갖게 되며 첫사랑에 빠진다.


여름에 시작된 사랑의 모험은 가을, 겨울을 이어가며 중대한 기점을 맞이한다. 귀도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여자들만큼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림에 대한 열망만으로 가득하고, 지니아는 그저 착하고 새침한 모델이라 다정하게 대해준 것뿐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니아는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아멜리아의 세계를 전유하며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이 주인공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눈이 먼 채 그녀의 사랑의 대상을 대신 욕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멜리아와 지니아 간의 관계를 파베세는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지니아에게 아멜리아와 귀도, 그리고 로드리게스는 서로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기이한 관계로 보이기도 한다.


파베세는 담담하게 진정 17세 소녀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들을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마지막에 성년으로 진입을 상징하는 담배를 피우기도 하지만 여전히 지니아는 수동적으로 아멜리아에게 이끌리기를 바라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의 욕망에 간신히 눈을 뜨던 시절, 그 무지하고도 순수하고도 이기적인 시절의 우리들 모습은 이처럼 우스꽝스럽고 자기 파괴적이며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실패한 첫사랑과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응어리가 어느 센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때 우리를 추동하게 했던 것은 모두 그전에 그렇게 했었으면 하는 어떤 바깥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파베세의 고독한 첫사랑 이야기인 <아름다운 여름>은 그 많은 생략과 흑백 영화 같은 정적, 선명하고 아름답고 때로는 섹시한 장면들, 순수함과 열망과 아름다운 분위기가 맴도는 아련한 성장 영화이자, 현대의 고전이다. 책을 다 덮고 나서 문득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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