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변이>, 리디아 데이비스
리디아 데이비스는 내가 그 존재를 전혀 모르는 작가다. <불안의 변이>는 1986년에서 2007년까지 출간한 짧은 단편집 성격의 4권의 책이 실린 두툼한 소설집이다.
마지막 권이 <불안의 변이>이고 나는 그녀의 글을 읽다가 카프카에 대한 단편 외에는 대부분 너무 지루해서 페이지를 건성건성 넘기기만 했다.
도무지 집중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스타일이 뭔지는 알겠고, 그 작업이 노리는 특정 산문의 미학적 방향성이 너무나 익숙하지만 그 친숙한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지난했다.
그것은 뭐랄까?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음악가의 고전 앨범을 최근에 감상한 누군가가 열광적인 장광설을 펼치면서 그 앨범 수록곡 하나하나와 구조에 대해서 큰 소리로 옆에서 떠드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핀잔을 주는 대신,
나는 약속이 있다며 슬쩍 일어나거나, 근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파는 가게가 없는지 둘러볼 참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을 택할 것이다.
과연, 내가 철 모르는 20대라면 이런 글들을 무척 재밌게, 스릴까지 느끼며 관찰하는 법과 묘사하는 법을, 아니 그 이전에 그녀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위한 생각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어떤 글쓰기에 대한 역겨움이 더 크다.
그것은 표현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녀가 적어 내려 가는 것은 어떤 캐릭터나 인물, 가상을 동원한 구조화된 내러티브가 아니라, 경험의 편린과 사색의 중간중간에 거시적이 아닌 미시적으로 자기 일상에 들어온 대상들을 신비화하는 것과 그 묘사의 인위적인 강도를 조절하는 의도적인 연기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도대체 그런 신비화와 한박자 늦은 감상이, 자조적인 나르시시즘이나, 시효가 지난 카프카류의 동어반복 또는 지난하고 가벼운 실존의 나열들이 아니면 뭘까?
이 지루함들의 변종들이 연속체로 늘어서 있다는 생각에 자꾸 하품이 나오기만 하는 것이다.
나는 뭔가 이런 글쓰기 타입에는 영원히 방탄되어 그 글쓰기 전략들이 절대 통하지 않는 물질로 코팅이 되어버린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도 같다.
같은 계열은 아닌데, 나는 시그리드 누네즈라는 작가의 글쓰기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뭐랄까, 영미권 작가가 일본의 사소설을 흉내 낸 듯한 모양새인데, 화자의 고독과 응큼함과 서운함, 주로 찐따감정이라 일컫는 감정들에 대한 권위자로서 자기를 드러내는 그런 종류의 서사였는데, 왠지 모르게 손이 가지 않고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그런 소설들이 주목받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적으로 나라는 독자의 문제라고 생각이 된다.
사실 나는 이런 류의 글쓰기는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단상 같은 기괴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글들이 지난 시절에 상도 받고 독자층도 확보했고 이런 글들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 언제까지나 신기하기만 하다.
생각은 변하고 감정도 변하고 마음은 또 다른 마음을 찾아가고 모험을 하는 와중에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변모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편협한 마음을 기록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