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엣>, 매기 넬슨
2019년에 출간되었던 매기 넬슨의 <블루엣>(2009년 발표)이 다시 문학동네로 출판사를 바꾸어서 나왔다.
나는 이름이 어디서 들어본 듯해서, 책을 꺼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저자의 <아르고호의 선원들>이란 책을 빌려 봤던 기억이 났다.
<아르고> 같은 경우, 한 번 빌려서 앞부분 몇 페이지를 읽다가, 도저히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란 생각에 바로 반납했다가, 이 저자의 책이 뉴욕 타임스 선정 21세기 전반부 100권에 들어가 있었단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빌렸었는데, 뭐랄까?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종류의 글쓰기라서 다시 그냥 반납한 기억이 있다.
그 저자의 나름, 이전 히트작이 이 <블루엣>이라는 책이다.
뭐랄까,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짧은 단장들 형식으로, '파란색'으로 알려진 'blue'라는 명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글인데, <아르고>처럼 과도하진 않지만, 여전히 이 저자가 '파란색'의 경험과 다양한 파란색에 관한 문헌들, 자료 조사들, 인용들로 허세를 늘어놓지 않았다면, 도저히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작금의 독자들에게 이런 식의 문체와 형식을 보여주는 그 근간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그 층위와 의도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가 닿을 영토가 있기는 한 건지, 추적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어 포기하게 되는 방식의 글쓰기는 아니었나 생각된다. 변종이되 열등한 인자를 모아놓은 그런 변종!
뭐랄까? 매기 넬슨은 아마도 8-90년대 프랑스 구조주의자 철학자 에세이스트인, 롤랑 바르트식의 단장형 글쓰기의 부서질듯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장들에 무척 경도되었던 것 같다. 거기에 미국 비평학파 특유의 냉철한 지성이 결부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내가 읽었던 <아르고>의 경우,
무척이나 음험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었단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떤 깜냥을 넘어선 종류의 음험함이었는데, 뭔가를 알아주길 바라는 의도 + 그런데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감상주의와 주의 주장들에 불과해서, 그 형식과 내용과 의도가 전혀 불일치하고, 성긴 오만함과, 질러보기 식의 편평한 생각들과 사생활 폭로의 마조히스트적 감각 그 어딘가에 위치함 딱한 글쓰기의 조합이었다.
내가 알기론, 바르트의 글에서 그가 고전 저자들의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는 가히, 그 인용이 내적 저자의 톤과 이야기의 강약과 잘 조화를 이뤄서, '인용'만으로 이뤄진 어떤 예술작품들을 읽는 식의 고양감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용의 앞뒤로 맥락과 감도와 특유의 분위기가 잘 조화되어 그것을 한 움큼 깨물었을 때, 여러 가지 맛이 하나하나 다 느껴지는 미식의 즐거움과 여운이 그것이었는데,
매기 넬슨의 경우 불닭맛 바르트라고 할까? 지독한 뒷맛과 가공식품의 불콰한 불쾌함이 그 근저에 깔려있는 것 같은데, 이런 식의 음험한 글쓰기의 이전형태가 바로 이 <블루엣>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식의 일관성이라도 보이고 있으니 독자들에겐 다행이다. 다음 책은 바로 건너뛸 수 있는 여지를 그나마 보여주었으니...
우리가 글쓰기로 예술가가 되길 바라고, 자신의 삶 자체를 그 글쓰기의 대상으로 하고 싶고, 그것을 통해 더 큰 영향력을 내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와, '나'라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를 잘 분해해서 그 요소들이 잘 섞여 들어갈 수 있는 재료들과 그 요소를 담을 그릇들을 잘 배치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매기 넬슨이 요리를 그리 잘 만들지 않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든 한 번 먹어봤던 메뉴를 그대로 만들 수 있다고 자만하는 그런 식의 요리사이리란 생각이 든다. 본인이 직접 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호사가 주어진다면, 결정적으로 소금과 맛소금을 혼동했음을 고백하지 않을까? 아니면, 본 재료의 신선함은 외면한 채 향신료가 빠졌기 때문에 그 맛을 낼 수 없다고 자평하는 쪽에 속하지 않을까?
여러 모로 <블루엣>은 지금 치열한 삶을 살아가거나, 또 다른 종류의 현실을 경험하고 싶은, 한국의 평균적인 독자들에겐 독이 될 수 있는 종류의 시간낭비란 생각이 든다.
부디 이 책을 들기 전에 도망가서, 제대로 된 단단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책들을 한 권이라도 더 읽기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