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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실남실 Mar 12. 2024

어둠의 세계와 유희하는 끝없는 밸런스 게임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리뷰 


우리나라에선 무라카미보단, 하루키로 더 많이 불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6년 만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었다. 


760페이지 분량의 꽤 두꺼운 책이다. 


총 3부 구성인데, 1부가 다소 지루했고, 2부에선 예의 하루키 스타일의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야기 진행이 빨라지다가, (내 기억으론 "댄스 댄스 댄스"와 "스푸트니크의 연인" 이후로 노골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유령 이야기", "더블의 테마"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짧은 3부는 에필로그 형태를 띠고 있어어 아쉽고 뭔가 쓰다만 듯한 느낌이 강하지만, 결국 할 일을 충실히 한 느낌도 읽다 보면 없지 않다. 


하루키 특유의 문체는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이미 완성되었고, 모험 테마와 판타지 구조는 "양을 쫓는 모험들"과 "댄스댄스댄스"에서 완벽한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을 완성시키는데, "상실의 시대"는 본인 말로 리얼리즘 색채가 짙은 소설인데 엄청나게 판매되면서 하루키는 본의 아니게 일본 밖의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고, 이후에 여행기인 "먼 북소리", 역시 리얼리즘 계열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쓰고 중기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를 통해 기존의 테마를 싹 다 집어넣는 대작을 펴낸다. 이후 단편집을 발매하다가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사회 참여 시선이 부각되게 되고 이는 "신의 아이들..."에서도 두드러진다. 이후 "해변의 카프카" "어둠의 저편" "1Q84" 등 후반기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킨다. 하루키의 책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사소한 에세이일지라도 엄청나게 판매되며 국내에서도 많은 팬덤이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단편집에서는 현대적인 문체들이 깔끔하게 어우러져 특히 세기말 또는 밀레니엄 초반 상실과 진공상태의 중간에 놓인 세대의 공허함을 잘 표현했던 것 같다.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은 작가이지만, 노련한 작가란 그런 단점을 최대한 억제시키는 구라의 힘을 잘도 구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하루키식"이라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고 또 잊게 된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경우 "1Q84"에서 익숙한 스토리 욱여넣기식의 전략이 풀어지려다 결국 후반부가 애매하게 마무리되어 독서의 기억이 전혀 없는 경우가 되어버렸고, 결과적으론 아쉬웠던 생각이 든다. 


반면 "여자 없는 남자들"과 "일인칭 단수"같은 단편집은 완성도가 어마어마해서 다소 이질적이었다. "역시 하루키는 단편이군!" 하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  


이 소설은 "해변의 카프카"나 "1Q84"와 같은 다이내믹한 인물들과 모험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작가후기를 통해 밝혔듯이 미완의 단편이자 하루키 소설 중 유일하게 그의 전집에도 들어가 있지 않고, 출간되지 않은 책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다시 쓴 장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은? 


"다시 쓰건 그렇지 않건 크게 인상적이지 않은 작품이란 게 내 생각이다." 


다만, 70대 노작가가 3년 동안 쓴 내용치 곤 그간 자신이 행한 자기 복제를 충분히 감안한다면 별점 3.5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성실성에 박수를 쳐 주고 싶고, 몇몇 문장이나 표현들에선 역시 녹록지 않은 필력을 볼 수 있는 정도이다. 



하루키의 대표작을 꼽을 때 "1Q84"나 "태엽 감는 새"등을 꺼내는데, 사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하루키식 판타지의 한 극점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소설 역시 "세계의 끝"으로 발전시킨 모티브를 공통으로 품고 있기 때문에 "세계의 끝"과 계속적인 비교상태에 위치하겠지만, 나는 비평적인 평가에선 당연히 "세계의 끝"이 계속 우위에 있을 것이고,


이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작가의 윤리적, 작가적 판단이 앞선, "내 아픈 자식을 조금은 제대로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는 그런, 실제 삶에선 겪어보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이 동한 그런 책이란 생각이 종합적이어서, 비평적인 판단을 내세우긴 조금 무리가 있겠다 싶다. 오에 겐자부로적인 하루키의 재림이랄까? 


20대에 읽은 하루키와 40대가 읽는 하루키는 달라야 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 소설 외적인 다른 것들을 더 읽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소설의 주제를  유령이야기로 볼 것인지, 다른 세계에 놓인 다른 자아가 둘 다 "나"인지 우리는 알 수 없고, 소설에서도 확인시켜주지 않지만, "나"와 "나라는 세계"가 놓인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와 다른 세계 속의 나를 항상 꿈꾸고, 그 두 개의 세계 속의 교차로를 탐색하는 것이 하루키라는 작가의 작가적 과업이라고, 하루키 작품을 통과하는 거대한 모티브 혹은 은유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거기에 덧붙여 "세계의 끝"에서도 보이는 작가 또는 화자가 자신이 속한-또는 창작한 세계에 대해 느끼는 강력한 책임감 내지는 내적 윤리가 더 강조된 느낌을 받았다)  


픽션, 작가의 과업, 

평생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정해져 있고, 여러 작품들은 결국 특정 모티브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클리셰를 과감하게 인정하는 용기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 


하루키도 하루키의 독자도 늙는다.

 결국 영원히 젊은것은, 불멸의 힘을 얻는 것은 새로운 독자를 통해 계속 읽힐 소설의 주인공들과 주인공이 겪는 모험 이야기일 뿐이다. 


"도시과 그 불확실한 벽"

은 차분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나"의 상실감을 이끌어내는 1부에선 "벽에 둘러싸인 도시"와 현재의 "나"가 교차로 진행되면서 아슬아슬한 스릴을 보여주는데, 


2부에서 또 다른 "나"가 공간을 달리해서 세계가 미묘하게 균형을 잃어가는 곳으로 이끌리고, 거기 다른 곳에서 "도시"에서의 기억을 따라가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들 또는 유령과 조우한다. 하지만 세부는 종종 잊히면서 이야기가 확장될 법하다가 급격하게 3부로 이끌리면서 "나"는 "도시"에서 완전히 빠져나온다. 그 빠져나옴이 "어둠"과 "죽음"이라는 익숙하고도 새로운 질감의 은유로 우리를 이끈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오랜만에 들린 노포처럼 반가운 마음에 한 번쯤 읽어봐도 무방한 소품(이라고 하기엔 좀 길긴 하지만).


비애와 서정 그리고 상실의 세계에서, 

이 세계와 "바깥의 세계"와의 한 없는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밸런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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