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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r 07. 2019

<라스트 미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죽음 앞에 연민하지 않는 법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볼 때마다 여러모로 난감하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한 구석이 있다. 또한 별다른 형식적 실험 없이 그저 이야기로만 극을 이끌어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작품보다 작가주의적이란 생각이 들면서 영화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매 영화마다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고 사적 역사를 새겨가는 이스트우드만의 작품형식과 철학에 기인하는 듯 보인다. 시대적 배경을 읽고 기호와 상징 등 여러 수사를 부여해가면서 그의 영화를 해석하는 일은 우리의 지적인 욕망을 자극하면서도 또한 솔깃할 순 있지만, 이스트우드의 영화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지름길이라는 걸 매번 깨닫게 만든다.

<라스트 미션>은 철저하게 이스트 우드의 육체에 새겨진 노령의 몸을 마주하는 영화다. 굽은 등과 가는 팔, 저는 발걸음과 어눌한 말투까지. 더 이상 서부의 총잡이를 자처할 수 없는 이스트우드의 몸 그 자체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 스펙터클이자 하나의 사건이다.


그런 맥락으로 이스트우드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응시나 관찰이 아닌 시간 앞에 무력해진 육체 앞에서 무력하게 견디고 있는 어떤 상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스트우드의 몸과 얼굴을 비출 때마다 흐릿해지는 카메라의 초점이 이를 뒷받침 한다. 말하자면 <라스트 미션>은 시간에 저항하는 이스트우드의 몸과 카메라의 불안정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맨살의 영화다. 때문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자동차, 음식, 돈과 섹스는 표면적으로 매혹적임과 동시에 시간 앞에 무기력해지는 인상으로도 다가온다.

 눈여겨봐야할 지점이 있다. 이스트우드의 영화에 나타나는 혐오와 젠더, 인종에 관한 정치적 숏들은 기묘하다. <라스트 미션>역시 그렇다. 얼은 흑인 가족과 부치 여러 명을 만나 니그로, 아들 이란 말로 그들을 당혹시킨다. 이렇게 폭력적이기까지 한 차별의 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지만, 선의로 가득찬 얼의 행동이 이 당혹감을 무화시킨다. 동시에 이들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적 질서 안으로 그들을 포섭시킴으로써 묘한 연대의 기운을 감흥토록 하는 지점은 비밀스러우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라스트 미션>은 법과 제도를 벗어나 자신이 지닌 질서를 추구하는 한 인물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이스트우드는 사회와 불화함과 동시에 누구보다 냉철하게 사회 질서 속으로 본인을 밀어 넣으면서 스스로를 심판한다. 이 가혹안 역설을 대하는 작가적 태도가 <라스트 미션>에 오롯이 녹여져있다. 이 영화는 <그랜 토리노>에서 볼 수 있는 총잡이의 위대한 마무리나 유언이 아니라 힘껏 타오르다 잿더미가 돼버린 한 사람의 지나온 생을 마주하는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고 끝내 웃음거리로 만들고 마는 카메라의 시선과 거리를 유지하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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