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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un 13. 2019

정말로 스포일러는 영화에 중요한가요?

이 글에는 <엔드게임>과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기생충>과 <어벤저스 :엔드게임>. 2019년 상반기 한국 극장가를 이야기할 때,  이 두 편의 영화를 분명 빼놓을 순 없을 것입니다. 두 영화는 분명 규모와 다루고 있는 주제가 판이하게 다르지만, 어쩐지 함께 묶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평단과 관객들의 고른 지지를 받은 점은 분명 이례적이고 두 영화 모두 스포일러에 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 그렇습니다.


 아마도 스포일러에 관한 관객과 제작진의 태도가 두 영화 모두 비슷하게 보였단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엔드게임>의 경우, 배우와 제작진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서 "플리즈 돈 스포일 엔드게임"이라 말하는 광고를 보며, 또 공식적으로 스포일러 해방을 선언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내가 보는 게 진정 영화 광고인가 아니면 프로 레슬링 광고의 '돈 트라이 디스 엣 홈'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스포일러를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을 땐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저렇게까지?"


 <기생충>은 또 어떻습니까. 문광(이정은 배우)의 남편 역으로 등장한 박명훈 배우가 칸 영화제 당시 다른 배우들과 함께 레드카펫에 서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땐 씁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스포일러 방지를 요하는 영화의 부탁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며 대다수 관객(이라 하기엔 적절치 못한 것 같고 각각의 영화를 너무나 애정 하는 사람들이라 칭하고 싶습니다)과 평자는 그들의 요구에 그대로 순응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비평가의 경우, 영화제와 사전 시사회를 거쳐 영화를 미리 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요구되는 엠바고는 영화가 시장에 들어서기전 판매자와 대리인, 상호 간에 존재하는 일종의 매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시장에 등장한 영화에 관한 일종의 엠바고를 관객에게까지 요구할 권리와 필요가 진정 있을까요.


 두 영화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기생충>과 <엔드게임> 모두 특정 인물의 죽음이 스포일러로 여겨집니다. 그중에서도 <엔드게임>은 토니 스타크와 블랙 위도우의 죽음 중 토니의 죽음이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일례로 각종 영화 커뮤니티에 <엔드게임>을 보고 토니 스타크 죽음을 서두에 이야기하거나 <기생충>의 후반부 시퀀스에 관한 언급을 한 사람은 거의 매도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쯤 되면 질문 해보고 싶어 집니다. 정말로 두 영화가 그려낸 반전. 그러니까 <엔드게임>에선 토니 스타크가, <기생충>에선 박사장과 기정, 그리고 문광의 남편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두 영화에 관한 일련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사실 말입니다.


 누군가는 영화의 내적 서사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스포일러가 분명 영화적 재미에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재미는 과연 객관적일 수 있나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상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주관의 영역이지 않을까요.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각각의 감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품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삶과 시간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 아닌가요. 영화를 관람할 때 서사의 개연성을 상관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요. 역사적 사실이 영화화된 경우라던지, 리메이크된 작품들의 경우 이야기의 끝을 알더라도 얼마든지 작품성 있고 재밌게 본 작품들을 우리는 열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영화 속 줄거리와 서사라는 건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일 뿐이지, 그것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정말로 엄청난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상관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야기의 완결성을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에 관한 말들을 자유롭게 쏟아 냈을 때 특정 사안에 관 강압적이거나 어떤 면에선 폭력적이기까지 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당위가 얻어지는 걸까요. 그리고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러니까 요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스포일러를 이야기하지 않을 때 이득을 봅니까. 그리고 누가 스포일러를 스포일러라 규정합니까. 누군가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를 이야기할 때,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정말 스포일러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본 어떤 사람이 그것을 스포라고 명명해주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 또한 스포일러의 증인이자 일종의 공범이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 장면을 스포일러이자 일종의 범죄라 호명하는 지점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하는 사실을요. 그것은 스포일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이 스포일러라고 인정해주는 증인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요.       


 걱정스러운 지점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영화를 만든 이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연출자마저 스포일러에 관한 우려를 전면화할 때, 스포일러가 알려지는 걸 우려할 정도라면 그건 자신의 영화가 이야기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자포자기의 선언 같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여기엔 앞서 말한 영화의 상업적인 성공과 연결된 복잡한 문제들이 다수 존재하겠지만, 그 책임감과는 별개로 연출자가 일련의 스포일러 방지 캠페인에 동참한다는 것은 어쩌면 영화가 이야기에 귀속돼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셈이 아닐까. 그리고 그건 영화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걸로도 비약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영화감독들을 저 스스로가 옹호할 수 있을까라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전부터 봉준호라는 작가에 관한 개인적인 애정에 관한 소고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쩌면 대다수의 관객들이(이를테면 두 영화의 결말을 수호하기 위해 누구보다 필사적이었던 사람들) 원하는 건 영화가 아니라 이야기였던 게 아닐까란 생각도요. 그렇다면 이제 정말 영화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저는 <엔드게임>에 관해 짧은 의문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기생충>이 그려내는 죽음은 우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여기엔 서사적 당위가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문광의 남편이 왜 하필 기정을 죽였는가 하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구체적으로 알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잃고 분노에 찬 문광은 칼을 빼 들었고 그의 앞에 기택 가족 중의 한 사람인 기정이 있었기 때문이란 점이 가장 일리 있어 보이는 말일 것입니다. 기택이 박사장에게 칼을 휘두른 것 또한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교묘하게 서사적으로 당위성을 부여한 측면이 없다고 보기 힘들기도 합니다)


 반대로 <엔드게임>을 이야기할 때, 정말로 우리는 토니 스타크가 죽음에 이를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어벤저스 1>에서부터 <인피니티 워>까지 토니 스타크는 죽음에 가장 근접해있던 인물이었으며 다른 작품에서도 그의 죽음이 간접적으로 시사됐다는 점은,  어벤저스의 인피니티 스톤 시리즈가 토니 스타크의 죽음이란 서사적 귀결에 필사적이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떨칠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죽음을 그려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신성하고 하나의 신화적 존재로 그리기 위해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영화가 사실은 <엔드게임>이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엔드게임>의 스포일러는 사실 알려졌더라도 무방했던 이야기이지 않았을까요. 스포일러와 별개로 <엔드게임>이 토니 스타크의 죽음을 다루는 데 지나치게 상업적이었던 측면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정말로 스포일러의 문제라면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ps. 이러면서도 저 어벤저스 개봉일 오전 7시 30분 영화를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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