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분자>
서울 시내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정신병리학적 증세를 보이는 분들과 자주 마주칠 기회가 생긴다. 이들은 일면식도 없는 다른 좌석 승객에게 느닷없이 공격이나 위협을 가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불특정 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른다. 놀란 승객들이 코레일 직원이나 경찰을 부르면 위협자들은 “저 사람이 나를 위협하려 했어요”(정신 병리학적으로는 조현병의 한 증상이라고 한다.) 라는 해명으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곤 한다. 이런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곧장 자리를 피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반복해서 마주칠 때마다 생기는 어떤 두려움이나 트라우마는 점점 내면 깊숙이 자리잡는다.
의아하게도 <공포분자>를 보자마자 떠오른 잔상은 바로 지하철을 탈 때마다 간혹 마주치던 그 ‘위협자’들의 인상이었다. 이는 영화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데, 공포분자의 영어원제인 ‘The Terroriser’를 기반으로 생각했을 때, 왜 ‘terrorist’ 가 아니라, The Terroriser’ 인가를 먼저 고민해봐야 한다. 전자가 계획에 따른 (타자를 향한) 공포의 실현이라면, 후자는 표적 없이 표류하는 기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공포분자는 만인이 만인을 위협하고 또 서로가 누군가에게 위협당할까 진정하지 못하는 상호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동기를 찾기 어려운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몇몇의 인물들과 파편적으로 흩어지고 단절된 관계와 서사가 연속해서 배열돼있는 경우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파국적 결말까지. 마지막 두 시퀀스가 끝나자마자 구토를 하기 시작하는 울분의 행위를 보면서 <공포분자>는 관객에게 몇 가지 갈래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순간을 제시한다. 마지막 두 장면 중 어느 순간이 진실인가? 아니면 두 장면 모두 꿈인 건가? 혹은 울분의 구토는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헛구역질인가 아니면 예상되는 징후에 대한 신경과민이나 임신 초기의 입덧과 같은 사례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난처함과 마주하도록 한다.
여기서 순전히 개인적인 직관을 근거로 이 영화의 마지막 두 시퀀스(울분의 남편이 총을 빼앗은 뒤 벌어지는 피칠갑의 향연)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울분의 꿈이나 불안의 형상화라고 가정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결론에 이끌린다. 이는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를 구분하기 이전에 이미 프레임 안에 펼쳐진 이야기들은 결국 각각의 픽션들이 아닌가 하는 허무감에 기인하는 것 같다. 대신 이 영화가 가져다 주는 공포와 위협은 영화 바깥에서부터 도시가 우리를 위협한다 라는 불안을 야기하는 것만 같다.
울분과 사진기사, 혼혈소녀가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는 소설과 거짓말, 장난전화와 같은 픽션, 즉 거짓말이 단초가 된다. (이 픽션들이 폭력의 동기라는 주장이라기 보단 이들을 사람들이 교차하는 도시라는 공간에 마주치도록 하는 시발점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은 거짓말을 허구로 이야기 하면서도 허구를 구실로 움직인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가 서로를 마주치도록 하는 셈이다. <공포분자>가 제시하는 상호 간의 공포란 어쩌면 이런 조현 증상의 발현이 아닌가?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혹은 그것이 일상에 흔히 볼 수 있는 타자의 얼굴을 띄고 출몰한다. 카메라를 든 청년이 교각으로 올라간 뒤 배우와 일반 시민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을 뷰파인더에 담는 장면들이 여전히 떠오른다. 여기서 카메라에 담기는 각각의 인물들은 찍는 자를 비롯해 찍히는 자 서로가 무관한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각각의 가능성을 지닌 개체들의 연속적인 배열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더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