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이해도 못했으면서 왓챠에 별 다섯 개를 줬었지
김금희 작가의 소설 <경애의 마음> 중
"그건 네가 타고 온 전철처럼 필연과 우연이 적절히 섞여 있어야 해. 나는 특정 감독의 작품만 판다든가 배우의 광팬이 되어 영화를 고른다든가 하는 건 좀 촌스럽다고 생각해. 그건 영화의 본질을 모르는 거야. 영화에 대한 마니아적 지식이나 쌓아놓고 떠드는 애들을 보면 너무 한심해. 시퀀스가 어떻고 카메라 워킹이 어떻고 씬의 전환이나 무슨무슨 주의들을 가지고 해석하는 애들 말이야."
"하지만 너도 데이비드 린치가 좋다며?"
"린치는 달라. 린치는 감히 장악할 수 없는 세계니까 나는 좋아만 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해. 때로 린치를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야."
E는 그 외에도 사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도 씬도 배우도 아니고 오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과 상영되는 영화 사이에 이는 그 순간의 시간이라는 좀 과격한 논리를 폈고 그걸 '불타는 시간'이라고 불렀다, 관객과 영화가 만나 영상의 자극에 관객의 모든 것이 반응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소멸해버리는 것, 그동안에 일어나는 감각의 에너지.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결국 다 식어버린 잿더미 같은 얘기라는 말이지. 우리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영화는 결국 다 차갑고 죽어버린 것이 돼. 기억 속에서 그렇게 죽어버린 영화를 만나는 거야."
그렇게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의 무상함을 얘기해놓고 E는 경애에게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경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사실 자기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큰 마음먹고 예술 영화를 한 편 보겠다고 다짐했을 때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데이비드 린치입니다. 그가 연출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우리에게 BBC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영화로도 더 잘 알려져 있어요.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 한 번 내가 평가해주지' 란 마음으로 섣불리 이 영화를 틀었다간 중반 이후에 급속도로 난해해지는 이 영화의 줄거리와 이미지, 인물들 간의 관계로 인해 그야말로 넉다운이 돼 버리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당연히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고 이 자리를 빌려 얘기하고 싶네요. 몇 년 전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봤지만 그저 이 영화를 끝까지 봤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으로 아무 생각 없이 '왓챠' 별점 만점을 줬으니 말이에요.
그건 제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고 싶은 마음보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더 컸기 때문이었어요. 수많은 비평가들과 영화광들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관한 찬사를 늘어놓을 때마다 저는 대체 무슨 영화길래 이렇게 난리일까 의아해하면서도 그들이 내리는 평가의 자리에 나도 서보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했으니까요. 또 주변에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을 좋아하거나 그의 영화에 관해 지적인 자세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와 저 사람 힙하다.' '부럽다' 란 생각을 꽤 오래 했었으니 말이죠. 결국 그 이미지를 갖기 위해 억지로 영화를 이해한 척 거짓말을 했던 셈이었어요.
비교적 최근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사실을 주변에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명작이라 일컫는 영화들 중에 그냥 있어 보이고 싶어서 그 영화를 보고 감명받은 척 거짓말을 한 적이 많다고 말이죠. 신기하게도 제 얘기를 듣고 공감해주는 이들이 많아 조금 놀랍기도 하고 그 때문에 안도감도 느꼈어요. "나도 예전에 동경이야기를 보고 감명받은 척 인스타그램에 감상평을 올렸었어"란 이야기를 하는 친구도 있었고, 반대로 모두가 혹평하는 영화를 그저 오기 하나만 갖고 좋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중요한 점은 누구도 그 사실을 깊이 들춰보려는 사람들이 없어 다들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답니다.
비단 <멀홀랜드 드라이브> 뿐 아니라 예술영화라 일컬어지는 영화들 중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 영화들, 혹은 모두가 인정하는 어떤 작품을 본 뒤 정작 본인은 아무 감흥도 얻지 못하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비일비재한 것 같아요.
아무튼 이 혼란스러운 시간이 닥쳤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왜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끝까지 이해해 보려 반복해서 그 영화를 보고, 관련 자료들을 끊임없이 수집하는 것. 두 번째는 사실 별것도 아닌 영화인데 사람들 말에 의해 부풀려진 영화라며 그 영화의 가치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경우가 있겠죠. 마지막으론 그냥 모르는 상태를 인정하고 다음에 그 영화와 우연히 만났을 때 스스로가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기대하는 경우가 있을 테고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보고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지만, 저는 어떤 영화를 보고 감흥을 얻지 못했을 때 실망하기보다 혼란스러운 그 지점을 그대로 두는 편이 가장 낫다는 것을 요즘 들어 더욱 실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지금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요. 좋아하는 편은 더더욱 아니죠. 하지만 어떤 영화를 처음에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 영화가 좋아진 경우도 요즘 들어 더욱 느끼는 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다고 한 영화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 좋은 영화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그러니 더 이상 지적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좀 더 특이해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욱 확고해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에게도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은 영화가 있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