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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pr 09. 2018

오이디푸스의 백색 요람

<팬텀 스레드>

 

 레이놀즈를 붙잡고 있던 유령은 모성성이다. 오프닝 시퀀스에 우드콕의 작업실을 면밀히 관찰하던 카메라의 움직은 의상실에 내린 햇살을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응시는 이 공간이 부재하는 모성성을 보상받기 위한 순백의 요람임을 암시할 수 있는 하나의 예이다. 수직 테두리를 지닌 계단의 연쇄도 이 공간이 하나의 요람이자 아이의 시선으로 어머니의손길을 기다리고 있단 걸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곳은 지독한 마마보이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서린 사적공간이다. 우드콕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만들던 사람이었고, 엘마를 처음 만나자마자 그가 진지하게 건넨 말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이놀즈가 지독한 형식주의자인 부분이나 남성성에 대한 그의 알 수 없는 적대감도 이런 그의 모성에 대한 결핍으로부터 비롯됐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영화 속 레이놀즈를 제외한 남성들은 철저히 외면당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우드콕의 작업실에 남자 직원은 존재하지 않고, 남성들을 대하는 레이놀즈의 태도 또한 굉장히 삐딱하다. 조금 비약하면 레이놀즈 혼자 이 영화 속에 남성으로 존재하고 싶은 듯 보인다. 그러니까 레이놀즈의 심리는 여전히 프로이트적인 유아 상태에 놓여있는 셈이라 볼 수도 있는 셈이다. 동시에 그는 어머니와 같이 자신의 맹목적인 생떼를 받아줄 사람을 찾는 중이다. 이 모든걸 감내하면서, 하나의 게임으로 인식한 엘마는 그가 찾아 해맨 이상적인 치수를 가진 존재이다. 아픈 그의 병실에 나타난 모성의 유령이, 엘마의 등장으로 사라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있겠다.

레이놀즈와 엘마의 관계는 사랑의 사도마조히즘적인 형태의 은유이자, 동시에 이 사랑은 연인관계 뿐만 아니라 모자관계의 불편한 진실로 확장된다는 점에 흥미롭다. 게임에 중독된 듯 보이는 두 사람은 이 뫼비우스의 띠로부터 더이상 빠져나올 수 없게 돼버렸다. 이들은 이 역학관계가 자기파괴적인 순간으로 서로를 인도함을 알면서도, 관계의 역전에서부터 느껴지는 일종의 쾌락 때문에 서로를 버리지 못한다. 아이러니하지만 pta는 그게 영원한 사랑의 필요조건이라 믿는 걸지도 모르겠다.

고전주의에 대한 찬미도 엿볼 수 있는 영화다. 특히나 쇼트의 전환이나 음악의 사용, 운전 장면들은 고전영화의 형식들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Pta는 쉬크를 쉿이라 생각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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