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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Jan 30. 2019

<살인마 잭의 집>을 보고


<살인마 잭의 집> 은 아마 우리가 이 영화에 관해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지점들을 꽤 벗어날지 모른다. 집요하면서 자기 파괴적이고 동시에 예술가로서 자신에 관한 강한 집착과 자기애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체호프의 권총처럼 살인 도구를 응시하는 지점에서부터 영화는 일종의 게임을 시작한다.

 첫 시퀀스가 가져다준 당혹감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우마 서먼은 일종의 유혹자이다. 천연덕스럽게 잭에게 '고장 난 잭'(자동차 공구 중 하나)을 그와 가까운 자리에 놓으면서 그의 심기를 점점 건드린다. 살인의 알리바이를 가르쳐 준다던지 잭을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그의 주위를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마 서먼은 분명 잭을 시험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여기서 시험당하는 사람이 그걸 지켜보는 관객 또한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흔들리는 카메라는 갈등하는 잭과 우마 서먼을 번갈아 보여주고, 고장 난 잭을 클로즈업한다. 총을 보여줬다면 분명 쏴야만 하고, 고장 난 잭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라면 분명 내려쳐야 한다는 게 <살인마 잭의 집>의 각 시퀀스를 구성하는 구실 점이다. 이 영화는 그 지점을 관객으로 하여금 기다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지켜보는 이의 악마성을 시험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개봉 전부터 논란이 된 가학적인 장면들은 분명 불편하면서 종종 역겹다. 그런데 이 이미지들은 영화 맥락에서 돌출적으로 튀어나와 오히려 폭력의 이미지가 관객을 지켜보고 있는 쪽으로 작동하는 듯했다. 그러니 관음 하는 쪽이 유희를 느낄만한 요소는 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 따라선 예술에 관한 윤리적 기준이 흔들리는 경험도 겪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를 표현의 한계로 규정할 수 있을까. 동시에 중요한 사실은 폭력의 이미지가 선과 악을 구분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충분히 매혹적이란 점이다. 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영화들은 드물다는 점에서 <살인마 잭의 집>은 당혹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스스로가 위악을 자처해서라도 인간적인 해방과 자신의 근원적 노스탤지어에 닿겠다는 라스 폰 트리에의 저 고집을 나는 존중해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나치즘과 학살, 인종차별, 안티 페미니즘의 쇼트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예술관이라 명명하는 영화인지도 아직 헷갈리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의 악마성을 드러내면서 자기 신념을 위해 지옥까지 마다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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