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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준 Jul 29. 2019

질투하는 습관이 무서운 진짜 이유

진작 이렇게 생각할 걸 그랬어


얼마 전 우연히 단편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는데, 짧은 내용임에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는 비쩍 마른 남자아이가 휘청거리며 플랫폼으로 걸어가 낡아빠진 슬리퍼 한 짝을 주워 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 아이는 한쪽 구석으로 가 다 터진 슬리퍼를 고쳐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고쳐지지 않자 실망하다 못해 화가 난 얼굴이 된다. 


아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앞으로 검은색 새 가죽 구두 한 쌍이 지나갔다. 구두의 주인인 또 다른 남자아이는 걸으면서도 연신 손수건으로 구두의 먼지를 털고 있었다. 앞서 가던 아버지는 아이에게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더니, 의자를 가리키며 얌전히 앉아 열차를 기다리라고 했다. 

남자아이는 의자로 가 앉은 뒤에도 계속 구두를 닦았다. 그 모습만 봐도 아이가 구두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가죽 구두를 신은 아이는 멀지 않은 곳에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낡은 슬리퍼를 들고 있던 아이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가죽 구두를 빤히 쳐다보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 아이가 가진 거라곤 낡아빠진 슬리퍼 한 짝뿐인 데다 자신을 돌봐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왔고 사람들이 열차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가 빨리 열차를 타야 한다고 했지만 아이는 구두를 닦는 데만 정신이 팔린 탓에 인파에 밀려 뒤쪽으로 처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조바심을 내며 아들을 끌어당겼고 뒤쪽 승객도 마음이 급했는지 아이를 앞으로 밀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의 가죽 구두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으로 떨어졌다. 바로 그때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뛰어내려 구두를 주울 수 없었던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슬리퍼를 신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남자아이가 쏜살같이 뛰어나와 가죽 구두를 집어 들었다. 아이는 보물이라도 얻은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이 모습을 본 사람이 없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구두를 보며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자아이는 발걸음을 떼더니 슬리퍼가 벗겨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구두를 손에 꼭 쥔 채 열차를 쫓기 시작했다. 가죽 구두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열차보다 빨리 달릴 수 있겠는가. 아이가 겨우 열차 문 앞에 가까이 갔지만 열차는 속도를 내며 멀어졌다. 아이는 온 힘을 쏟아 구두 한 짝을 열차 안으로 집어 던졌다. 안타깝게도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구두 한 짝은 차체를 맞고 튕겨 나와 플랫폼 끄트머리로 떨어졌다. 아이의 얼굴에는 구두를 잃어버린 아이를 향한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열차 문에 서 있던 가죽 구두를 신은 아이는 자신이 아끼는 신발을 되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도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구두를 잃어버린 남자아이가 남아 있던 한 짝을 벗더니 창밖의 아이에게 던져준 것이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구두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구두를 던져준 뒤 플랫폼에 서 있는 남자아이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묵묵히 지켜볼 뿐 아들을 꾸짖지 않았다. 

플랫폼에 서 있던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나머지 구두 한 짝을 집어 들었다. 얼떨결에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구두 한 켤레를 가지게 된 것이다.



영화는 고작 몇 분짜리였지만 나는 며칠 동안이나 그 이야기를 곱씹었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주는 감동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선 슬리퍼를 신은 소년이 어째서 열차를 쫓아 뛰었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여기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질투라는 감정이 이 소년의 선량함을 삼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우리의 예상과 다른 결론을 맺은 것이다. 사실 이 소년은 자신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을 질투할 수도 있었다. 만약 소년의 마음속에 ‘내가 못 갖는 거면 너도 가지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구두 한 짝을 숨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럽다는 감정을 가질지언정 질투는 하지 않았다. 


‘질투’와 ‘부러움’은 모두 상대가 나보다 더 나은 것을 가졌을 때 생긴다. 하지만 이 둘은 매우 다르다. 질투가 부러움보다 훨씬 공격성이 강하며 더 쉽게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다.


질투를 할 때 사람의 머릿속에는 상대를 대신하거나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부러움은 이와 다르다. 누군가를 부러워할 때는 그를 통해 자신도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격려하게 된다. 질투처럼 상대를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각자가 가진 아름다움을 지켜나갈 수 있다.



질투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장점을 자신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삼기 힘들다. 그에게는 타인의 불행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질투의 가장 무서운 점이기도 하다. 질투하는 사람이 꼭 나쁜 사람이라는 법은 없지만,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오래가면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상대를 끌어내릴 수 있을지만을 궁리하게 된다. 상대를 망가뜨려야 자신의 부족함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영화 줄거리를 되짚어보자. 다행히도 슬리퍼를 신은 소년은 질투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는 대신 선량함을 택했다. 소년의 이런 선택이 가죽 구두를 신은 소년의 마음을 움직여 모두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나는 깨달음을 준 두 소년에게 감사했다.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해하고 질투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질투에 휘둘리지 않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자유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으며, 당신은 언제나 그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남의 질투심이다. 사람이 불행을 만났을 때 잘 생각해 보면 꼭 누구의 질투심이 구렁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리라. _ 라이너 마리아 릴케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참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

등 90년생들을 위한 41가지 현실적인 인생 띵언


*이 글은 <진작 이렇게 생각할 걸 그랬어>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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