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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준 Aug 05. 2019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녀가 던진 말

서른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서른은 갑작스럽고 느닷없이 찾아온다.  

사실 서른은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아니라 

서른 하고도 몇 년을 더 지나야 실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직 이십 대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못했고

삼십 대라고 하기엔 겪어보지 않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스무 살 무렵엔 

서른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내 연애는 남들과 달리 특별할 줄 알았고 

내 명의의 집과 차를 가질 줄 알았고 

능력 있고 잘나가는 직장인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하나 이뤄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무렵

진정한 삼십 대가 되었다는 걸 

아직 어른이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

서른이 되면 남 탓이 아닌 내 탓을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충고가 아닌 위로를 할 수 있으며 

적에게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혼자보다 둘이 있을 때 더 외로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며 

인생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시기만 있을 뿐임을 깨닫게 된다. 

서른은 조금 외롭지만, 그렇게 단단해지는 나이다. 




혼자 있을 때보다

둘이 더 외롭다면


행복이 더디게 온다면 당신은 얼마나 오래 기다릴 수 있는가? 오는 중에 길을 잃을 기회를 몇 번 정도 주고 싶은가?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녀는 이미 삼십 대를 한참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그 나이에는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인생의 목표를 다른 것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사랑을 꿈꿀 나이가 아니라 말이다.

어쩌면 이 점 때문에 남자는 보통 결혼 생활에서 배우자와 잘 지내거나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데 게을러지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길 뿐 이 상황이 상대가 바라던 행복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행복은 항상 두 사람의 일이지만 그녀가 바라던 행복은 남의 눈에 부러운 무엇이 아니라 내면의 안정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남의 눈에 보이는 행복을 유지하려고 자신을 괴롭히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헤어지겠다고 결심하기 전, 이렇게 돌아서면 다시는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외롭게 살 남은 평생이 두렵지 않았다. 가장 두려웠던 건 분명 곁에 누군가가 있는데도 정작 자신은 더 외롭다는 것이었다. 외로움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이 있는데도 외로움이 커지는 게 싫었다.  

한때는 그 사람과 함께 영원히 걷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느 길모퉁이에서 두 사람은 상대의 손을 놓은 것일까? 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단지 서로의 온기를 나누거나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다 인생이 이 모양이 됐는지 그녀는 자신에게 화가 나고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지난 하루하루는 자신이 살아왔고, 후회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자신에 대한 가장 단순한 책임은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의 그녀는 정말 그녀답지 않았다. 물론 그런 때의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 같지 않다. 만족스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며, 즐겁지 않은 일을 하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까. 어쩌면 헛된 노력을 더는 하고 싶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무언가에 구조될 수 있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잊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의 그녀는 세상이 고요해질 때마다 내면의 슬픔과 가만히 마주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 있었지만 이렇게 남아 있는 게 습관 때문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음이 이미 먼 곳에 있어 그의 슬픔도 기쁨도 상관하지 않게 됐다. 마음이 약해서, 자신에게는 잔인하지만 그의 곁에 남는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녀는 사실 언제 헤어졌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쯤에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자신과 제대로 마주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됐다. 스스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무시하니 다른 사람들도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슬픔을 무시했다.



하루하루가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있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깨달았다. 지난날 자발적으로 했던 희생과 봉사는 그저 자기 자신이라는 관중 하나를 감동시키기 위해서였음을 말이다. 

그녀는 미적거리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그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게 상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어차피 떠날 거라면 무엇 때문에 서로 시원시원하게 헤어져주지 못했을까.

먼저 헤어지자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때 사랑했으니 말이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사람은 헤어지기 전부터 오랫동안 아팠을 것이고, 상대는 헤어진 뒤에 오랫동안 아플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다시 혼자만의 생활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게 됐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에게 잘하는 게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것은 그녀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의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다만 그녀는 끝나버린 그 시절을 인생에서 실수로 넘어진 시기라고 여기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걸 자신이 지닌 결점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우리는 미래에 다시 어떤 사람이 나타났을 때 자신에게 당황하거나 주눅 들지 말라고 위로해야 한다. 지난날의 상처를 앞으로 있을 행복이란 손안에 억지로 밀어 넣지 말라고 알려줘야 한다. 


서른은 조금 외롭지만 그렇게 단단해지는 나이다


스물의 아쉬움, 서른의 방황, 마흔의 설렘에 관하여


*이 글은 <서른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에서 필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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