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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준 Aug 06. 2019

조선 최고 재벌이
허허벌판에 학교를 세운 이유

역사의 쓸모

조선 최고의 명문가,

압록강을 건너다

우당 이회영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의 명이 다하자 압록강을 넘은 가족이 있습니다. 조선 땅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문가였던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 일가의 이야기입니다.


이회영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삼한갑족이란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만큼 이회영 일가 또한 부와 권력이 엄청났습니다. 몇 대에 걸쳐 풍족하게 쓸 수 있을 만큼 재산이 많았어요. 일제강점기에도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단어


영구 이은숙 (이회영의 아내) / 일조각 제공

하지만 이회영 일가는 가족회의를 열어 한반도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도모하지 않겠다”면서 결정을 내리죠.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독립운동에 이비자하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급히 재산을 처분했습니다. 일본이 이 사실을 알면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매로 헐값에 처분합니다. 명동 일대의 넓은 땅을 팔고 집과 물건들도 팔아버렸습니다. 그 돈을 지금 시세로 계산하면 무려 60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재산이죠.


이회영을 포함한 여섯 형제와 그 식솔들은 서간도로 가서 땅을 샀습니다. 그곳에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독립투사들을 지원했지요. 또한 형제들이 모두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가였던 거예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은 3년 만에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훗날 이회영의 아들이 쓴 자서전에 따르면 가족들은 모두 배를 곯았다고 합니다. 강냉이죽도 마음껏 먹지 못했다고 해요. 그토록 잘나갔던 집안의 사람들이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했던 것일까요? 꿈이 있기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식민지 해방의 꿈을 위해 추운 만주 땅에서 강냉이죽을 먹으며 버텼던 것입니다.


신흥무관학교,

독립군 승리의 서사를 쓰다


이회영은 동료들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투사들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습니다. 만주는 독립투쟁의 거점이었어요. 홍범도는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대패시켰고, 김좌진은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독립투쟁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죠.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은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독립군 토벌작전을 펼칩니다. 이에 만주지역에 엄청난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하지요. 

신흥무관학교 교사(校舍), 학생들의 영농 장면

교과서에 보면 이때 만주에서 활동했던 독립투쟁단체의 이름과 주요 활동 지역을 표시한 지도가 나옵니다. 한국독립군, 대한독립군, 서로 군정서군, 복로 군정서군, 조선 혁명군…… 참 많죠? 게다가 이런 단체들의 이동경로까지 나와요. 이쯤 오면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포기합니다. 제가 앞에서 말한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파트거든요. 등장하는 인물도, 단체도 너무 많다 보니 외우기가 힘들죠. “선생님 저 안 할래요. 왜 이렇게 비슷한 단체들이 많아요?” 하고 묻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누가 뭘 결성하고, 어느 단체가 생겼다가 없어지고, 또 다른 단체랑 합치고…… 막 이래요. 학생들에게는 정말 고난의 파트입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역경과 싸우다

1907년 해산 군인이 합류한 이후 의병의 모습

독립투쟁단체들의 이동경로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한번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그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움직였습니다. 낮에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 다녔을 거예요. 평지로 편하게 다녔을까요? 아닐 겁니다. 역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험한 산을 행군했을 겁니다. 만주가 얼마나 추운 곳입니까? 그 추운 땅에서 칼바람을 맞으면서 다닌 그 길이 화살표로 그려져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 화살표를 그냥 화살표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 화살표 안에 담겨 있는 그들의 발자국을 봐야 합니다. 그 발자국에 숨겨져 있는 건 그들이 꿈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꿈이에요. 식민지 조국을 남겨주지 않겠노라는 마음을 발자국에 담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일가,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다

우당 이회영(왼쪽) / 성재 이시영 초대 부통령(오른쪽)

이회영은 1932년 예순여섯의 나이에 상하이에서 붙잡혔습니다. 일흔이 다 된 적지 않은 나이에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지요. 마지막 순간까지 쉬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전 생애를 바쳐서 독립운동을 한 분입니다. 목적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사명과 의무를 다하다가 죽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_우당 이회영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 인생은 한 번 뿐이에요.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뿐인 젊음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역사라는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늘 사람들에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은 만큼 뒤이어 이 땅에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훗날 눈을 감는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에 평생으로 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수백 년 전 이야기로 오늘의 고민을 해결하는 세상에서

가장 실용적인 역사 사용법


<역사의 쓸모>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나는 역사에서 답을 찾았다!
_큰별쌤 최태성


강의를 듣는 내내 계속 울었습니다.
제가 역사를 통해 얻고 싶었던 것들을
드디어 얻을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_강연 후기 중



*이 글은 <역사의 쓸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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