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플하게 말한다
모 증권 회사에서 2년 동안 독서클럽을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독서클럽은 매월 새로운 책을 선정해 그 책을 읽고, 한 달 후에 모여 토론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독서클럽의 운영자는 책의 핵심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책과 비교해 무엇이 합리적인지를 따질 수 있어야 했죠. 때로는 특정 주제에 관해 강의도 해야 하고요.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독서클럽의 모든 참가자가 각자 맡은 책의 요약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독서클럽의 참가자 중 한 명은 임원이었는데, 그가 작성한 요약정리 문서가 다소 특이했습니다. 기업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보고서 양식을 따르고 있었죠. 각 항목에는 번호가 달렸고, 모든 문장은 제대로 된 동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음’ 혹은 ‘~임’ 정도의 마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문장이나 문단이 존재하지 않는 보고서였죠. 기업에서 쓸 특정 사업의 기획서 혹은 마케팅 보고서라면 별 문제 없을지 모르겠으나, 책의 요약정리 문서로는 적절치 않았습니다. 그 문서는 사실 혹은 단어를 나열한 것일뿐,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는 보기 어려웠으니까요.
저는 그 문서를 받아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갔습니다. 다 읽고 나서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그 문서에는 ‘첫째…… , 둘째……, 셋째…….’ 이런 식으로 사실들이 죽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개인의 주장은 하나도 없는 이 문서는 ‘사실은 이러이러하니 당신이 판단하고 결정하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죠.
기업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고를 올리고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하 직원은 자신의 주장 대신 여러 의견을 나열한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책임자 혹은 리더가 의사 결정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신규 사업 시행을 앞두고 전략 분석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규 사업의 장단점과 강점, 약점을 쭉 나열하고, 그래서 이 사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펼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아마도 그런 직원이 있다면, 그가 성공할 확률은 모 아니면 도가 되겠지요. 아주 잘될 경우 조직에서 크게 성공할 테지만, 실패할 경우 조직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항상 중간지대를 택합니다. 그렇게 무색무취 보고서가 완성됩니다.
솔직히 우리는 무언가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외우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했고, 무엇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를 따져야 하는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죠. 직장 혹은 사회에 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제대로 정리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상사로부터 “보고서 작성해서 올려.”라는 지시를 받으면, 자기 의견이 첨부되지 않는 상황 보고서를 올립니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주로 하나의 완성된 글이 아닌, 각 항목에 번호가 붙어 있는 사실들의 나열에 그칩니다. 거기에는 대개 내용에 대한 통찰도, 맥락도 없죠.
회사의 목표는 성과를 달성하는 것이기에, 구성원들에게 과거를 돌아보거나 상황의 의미를 되새겨볼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요약정리 훈련을 할 시간이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죠. 이러한 현상은 아직 사회 경험을 하지 않은 취업준비생의 자기소개서에서도 나타납니다. 자기소개서에는 지원자의 능력과 열정 그리고 꿈과 이상을 적습니다. 그런데 지원자에게 자기소개서 내용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기계적으로 적었거나,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걸 거짓으로 적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기가 쓴 글의 맥락조차 모릅니다. 그럼에도 기업도 지원자도 정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산업 사회에서 또 다른 사회로 변화 중인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산업 사회는 막스 베버의 관료주의,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Taylor)의 테일러리즘(Taylorism)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위계질서, 보편성, 과학적 관리 등을 특색으로 한 사회가 산업 사회였죠. 그래서 특별하고 튀는 인재보다는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규칙과 규율을 따르고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모범적인 구성원이 더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지금은 이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대기업 조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튀는 인재가 성공한다거나 상자 밖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구호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조직은 튀는 인재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튀는 인재가 되고 싶다면 회사를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서슴없이 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틀에 박힌 자기소개서가 계속해서 구인 시장에 등장하는 것이겠지요.
말하기는 근본적으로 글쓰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글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성성은 깊이 생각하고 정리할 때 나옵니다. 이는 전문성으로 이어지고, 명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됩니다.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은 비로소 구어체로 바뀌어 전달됩니다. 그렇기에 말을 잘하고 싶다면, 내용을 정리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물론 이 방법은 시간이 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손으로 써서 정리하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저처럼 말이죠.
복잡한 세상, 심플해지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이 글은 <나는 심플하게 말한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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