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예찬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계와 산업혁명, 그리고 대화보다는 발표를 해야 하는 요즈음의 남성적 요구 때문에 어쩌면 쇠퇴해가는 기술이기는 하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파티에서 술잔을 들고서, 친해지고 싶은 더 재미있는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곁눈질하며 나누는 생기 없는 수다가 아니다. 그런 수다에는 아무런 알맹이가 없다. 그보다는 작은 배처럼 같이 흔들리면서 사방으로 열린 전망에 다정하게 감탄하고, 그러면서 더욱 친해질 가능성을 언뜻 보고 기뻐하며 함께 떠갈 수 있는 그런 교류를 말하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맹공이 있기 전, 인도 사람들은 차 한 잔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 풍습은 서벵골 지역에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는 무언가를 하는(그러나 많이 하지는 않는) 식의 대화, 이른바 아다Adda를 완성했다. 아다를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 곧 아다바지Addabaj라면 보통 차와 커피를 놓고 친구들과 함께 중요한 일에 관해 느긋하게 대화를 나눈다. 이런 대화는 공적인 장소에서 그러나 매우 사적인 방식으로 벌어진다. 그러므로 그 논의는 사적이면서도 바깥세상의 것이 된다. 대화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뒷담화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 살롱에서 프랑스인들이 하던 것처럼 서로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무언가를 사고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관점을 교환하고, 배우고, 논쟁하고, 적극적으로 알고 싶어서 모인다. 그것은 경쟁이 아니며 선술집에서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싸우는 것도 아니다.
지역 주민들은 이런 대화가 전형적인 벵골식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머지 많은 지역의 사람들도 수백 년 동안 이런저런 형태로 그런 대화를 즐기곤 했을 것이다. 스페인, 터키, 이집트, 크메르, 우즈베크,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랬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벵골인 대화광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다. 오늘날 그 대화가 지극히 인도스럽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딱 한 번 그걸 해본 적이 있다. 콜카타 칼리지 가 근처의 인도식 커피 하우스에서였다. 그곳은 깊은 안마당을 둘러싼 몇 층 건물에 자리 잡은, 좌파 사고의 전설적인 산실이었다. 공기는 담배 연기 때문에 탁했고 커피는 최악이었으며 웨이터는 퉁명스럽고 음식은 도대체가 입에 넣을 가치도 없었지만, 대화만큼은 짜릿했다. 우리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혁명가였다. 호기심 많고 화도 많은 그 중산층 젊은이들은 훌륭한 대화 상대였다. 나는 몇 시간이나 머물렀다.
‘아다’는 운명을 다했다, 아니 적어도 쇠퇴하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레고식 건축물이 인도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우스 콜카타도 예외가 아니다. 반은 실내에, 반은 실외에 걸친 현관 베란다에서 빈둥거리며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수다를 떨며 옥신각신하면서 거리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더는 불가능하다. 현관 베란다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동냥 그릇을 옆에 놓고 벽에 기대앉은 거지부터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굉음을 내며 시내를 달리는 영리한 젊은이들까지, 토론을 위해 적어도 정보 쪼가리라도 거래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가상공간에 모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의 시간이 판매되고 있다. 자유 시간은 고갈되고 있다.
‘아다’라는 단어는 새의 둥지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오하게 인간적인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으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자유다
*이 글은 <게으름 예찬>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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