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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Mar 26. 2018

타협의 묘수

세상살이에서 한 가지씩 내려놓는 것이 타협이다.

진주 천리길 다녀왔다. 퇴직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함께 한 동반자 역시 같은 입장에서 친구였다.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뢰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였다는 동반자 의식은 그래서 바깥나들이에서 더 빛나나 보다. 삶의 결이란 묻어나는 것이다. 그리거나 덧칠하는 게 아니다. 살아온 만큼 찬란하다. 그러니 일부러 꾸밀 수 있는 게 아니다. 퇴직한 친구뿐 아니라 모두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평화로운 힘을 느꼈다. 아직도 악수의 여운이 미소 짓게 한다.


위안, 평화, 미소가 만남의 주조였다.

얼굴이 환하다.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근엄하지도 않았다. 다들 평화롭고 안온했다. 이것이 오래된 친구와의 만남이다. 만남의 민낯이다.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 동안 참 많은 변화가 느껴진다. 만날 사람에 대한 애정을 다시 떠올리고, 그와의 좋았던 추억을 곱씹는다. 변할 게 없지만, 어떤 생각의 편린들을 재확인하는 과정을 만난다. 생각의 자람이라든가, 어떤 대상을 해석하는 방식 등을 통하여 늘 같았던 친구를 더 든든하게 신뢰한다.


한결같이 타협의 달인이 된 듯한 표정들

속에서 깊은 안도를 했다. 어느 순간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이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게 내려놓는 타협이다. 심지어 취향조차 줄이기 마련이다.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게 있었다면 내려놓는 것들을 더 찾아내고 수시로 타협의 수순을 밟게 된다. 관조의 삶이 시작된다. 선수였다가 벤치에 앉아 전체를 바라본다. 영향을 주던 위치에서 영향의 힘이 어디에서 발생해서 어느 쪽을 향하는지 발견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친구 모두 달관된 듯한 양보의 심상을 지녔다.


2명의 퇴직 친구들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어쩌면 통과의례를 기다렸을까? 몇몇 친구로 위안이 될까 싶었던 '수고하였다'는 말 한마디, 힘이 돼줄 수 있었을까? 나의 퇴직을 알리지 말라 했는데, 끼어든 것은 아닐까? 마치 추인처럼 찾아가 수고했다는 말을 나누는 일이 의미가 있었겠는가 싶다. 하지만 두 친구는 오늘부터 마음 내려놓고 퇴직의 홀가분한 첫 날을 곱씹으며 시작할 것이다. 뭔가 미진한 것을 털어낸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서 내년 3월 23일을 다시 기다릴 것이다.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만나서 내려놓는 관조와 타협의 생활을 확인할 것이다. 약소하지만 대한민국 농고 교육 현장에서 삼십 년 이상 봉직하며 모든 풍파에 정면으로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던 투사적 교육 동지와 그의 부인에게 큰 박수를 길게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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