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형근 Jun 25. 2018

좋은 차는 우주의 시원을 안겨준다.

배냇향이 나는 녹차

“갓난애를 보면 누구나 생명의 신비를 느낍니다. 생명력 그 자체이니까요. 그래서 그 몸에서 나는 냄새는 정말 향기롭습니다. 배냇향이라는 건데. 이게 생명력의 냄새입니다. 그런데 좋은 차에서 바로 이 향기가 난다 이겁니다. 그래서 차=알가=우주적 시원이란 등식이 성립되는 거죠. 차를 마시는 일은 곧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이요. 정신적으로는 우주적 시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본인의 소설에서 능히 배냇향 이야기를 차마시는 장면에 집어 넣었다. 한 번도 어김없이 배냇향이 나는 차를 최고로 치는 구성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녹차로 차 세계에 입문하였다. 녹차로 시작하여 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주로 숙취 해소를 녹차에 의지한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안 마시는 날보다 마시는 날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몸 관리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하나의 주적을 세워 놓고 옳고 그름을 논하느라 좌석이 길었던 시절이다. 그 많은 정열과 애씀이 산화되었는지, 함께 싸웠던 논객들은 다 죽었는지, 내 안의 적들이 산화되었는지 녹차도 다른 차에 밀려 드물게 해후한다. 한승원 선생이 말한 알가(Argha)란 불가에서 일컫는 약초로, 미망을 걷어내고 참 지혜를 터득하게 한다고 한다. 이것이 곧 차나무를 일컫는 말이고, 그 어린 순의 정기가 바로 차라고 한다.


사람이 성숙하면 주적이 산화된다.

녹차를 낮은 온도의 물로 우리면 세 번까지는 몸을 풀지 않고 탱탱하다. 낮은 온도를 만들어 주는 주전자도 일단 끓었다가 온도를 지탱해주려는 것인지, 당장은 살벌하게 물의 속살이 뜨겁다. 숙우에 받아내어 물 옮기기 몇 번 해서 우린다. 딱 제 온도로 맞춘다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온도를 잘 적용하였을 때의 차맛은 한승원 선생의 말대로 배냇향이 난다. 나중에라도 배냇저고리의 향을 만날 수 있을까 싶지만, 통감각적으로 배냇향의 정체를 알만하다. 생명력을 배냇향에 등식으로 성립시킨 발상에서 선생의 차에 대한 오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선생은 차에 대한 정의를 한마디로 생명의 물이라고 한다. 차는 꽉 막히거나 사면초가로 나를 내몰 때,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들을 내치고 바꾼다.


속살이 뜨거운 온도를 받아 식히면

주전자의 계측에 따른 온도로 물을 받으면, 곧바로 물의 속살이 엄청나게 뜨겁다. 사실 온도로 치면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델 정도이다. 각종 숙우에 물을 번갈아 담으면서 속살의 절절하고 뜨거운 결합을 떼 내려고 애쓴다. 그렇게 몇 차례 기다린 물을 우렸을 때, 배냇향은 고스란히 내 몫이다.  매년 9증9포 녹차를 제다하였는데, 요 몇 년 참여하지 못하고 만든 것을 얻어 마셨다. 진정한 9증9포의 차맛을 직접 만들며 여러 해 경험하였기에 귀하여 혼자 드물게 꺼내 마신다. 누군가 차의 진경을 경험한 듯한 사람이 방문하면 소개하기도 하고, 우려서 함께 배냇향을 느껴보기도 한다. 땡글땡글하게 말렸던 잎이 저고리 풀어내듯 허물어질 때부터 아직 9번 이상, 그 이상 더 우릴 수 있으니, 잘 덖은 녹차의 은은하여 무궁한 진심을 어쩌 다 품으랴. 첫 번째 우린 것은 배릿한 향이 나는 십대의 맛이고, 열 번째는 사바 세상과 아미타 세상을 넘나드는 열반의 맛이라고 한다. 난 지금 그 열반의 차에 실려 있다.


말려 있을 때는 심연이었다가 풀어 내면 물에 떠서

녹차잎은 스스로의 사유로 무게를 덜어 내는 듯 하다. 입 안 가득 달고 발효되거나 신 음식에서 기어코 벗어나고 있다. 오랜만에 입안을 휑구듯 환하다. 모든 게 일정량의 시간과 더불어 진행된다. 물의 온도 역시 시간이 좀 지나면 주전자에서 설정한 온도로 보온을 통하여 유지한다. 바로 그 온도를 설정하고 가열한다고 설정 온도로 맞춤이지는 않다. 가열 이후, 보온 과정에서 정해진 시간을 쓰고서야 설정 근처로 모인다. 그러니 설정보다는 설정 이후의 과정을 살펴야 한다. 기계적인 설정으로 모든 것이 완료되는 현대 사회의 풍속에서, 설정 이후부터 살펴보는 과정을 수반하는 오래된 스승의 마음이어야 한다. 단추를 누르면 곧바로 그리 되도록 되어 있지 않다. 사람을 가르치거나, 만나는 교류도 그렇고, 차를 대하는 마음가짐도 그러하다. 애초에 내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완벽하지 않으니, 좀 더 익히거나 식혀서 과정을 관찰하고 심연과 표면 모두를 한 몸으로 여겨야 한다. 심연이었다가 표면이었다가, 남이었다가 측근이었다가, 닿기 어려운 우주의 시원이었다가 방금 만난 배냇향이었다가.

매거진의 이전글 꼬마일 적에 품었던 생각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