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이 頃刻이거늘

눈 깜빡할 사이

by 온형근

'경각을 다투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아마 '빨리 빨리'가 여러모로 의지하는 거처일테다. 살아있는 것들의 관계맺음도 그러할 것이다. 폭염이다. 타 들어간다. 살고 죽음이 경각이다. 한 노인이 폭염에 엎드려 사경에 든 채, 내 눈에 발견된 어제 이후, 부쩍 자란 생각이다.


올해 육묘장은 미스트 관수 시설 설치가 급선무다. 매일 호스로 물을 주어도 충분했건만, 상황이 변하고 있다. 하루만 놓쳐도 타들어가는 살아있는 나무의 묘목은 어린아이 다루듯 살펴야 한다. 그렇게 관수 후 돌아 본 한 건물 지나 저쪽 구석 건물 앞 포장 바닥에 그렇게 긴급 구조, 상황 급박이 있었다.


방금 육묘장 관수 후 인증 사진이 카톡으로 들어왔다. 고맙고 대견하다. 사람이나 동물이 심장 맥동으로 쿵쿵 가슴을 들썩이며 울리듯, 나무도 잎을 흔들며 떨면서 맥동한다. 맥박이 뛰듯 살아있기에 두근댄다. 두근대는 것의 정체가 살아있음이라.


관계맺음에서 이 두근대는 맥동이야말로 살맛내게 하는 에너지이다. 밋밋해서 더 이상 두근댐과 설렘이 사라진다면, 그것이 무관심이다. 살아있음의 대척점에 무관심이 자리한다. 생명의 경각은 관심과 무관심 사이에 달려 있다.


노자는, 화는 복에 의지하는 바이고, 복은 화가 잠복하고 있는 곳이라 했다. 모두 지독한 관심의 생명 운동이다. 화도 복도 관심이다. 생명이어서 경이로운 일이다. 노인이라서 치매라서 쓸모없어서 관심에서 멀어지는, 내몰리는 무관심보다는 올망졸망 붉으락푸르락 얽혀 사는 게 한 시절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