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형근 Feb 14. 2020

서서히 그리되더라

차호마다 제 역할을 찾다

새벽 눈 뜨면 다시 잠을 청하지 않는다. 저절로 잠이 올 때까지 둔다. 한나절을 서너 시간이라 한다면 딱 그 정도 시간이 지나야 스르륵 눕고 싶다.  그래서 점심 먹고 잠깐씩 눈 붙이라는 팁도 많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익숙하지 않아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이제는 괜찮다. 일정 모두를 오후로 잡아둔다. 오후 1시 이후로 바깥일을 잡으면 된다.


차호를 끄집어 양호하였다. 언제부터 차호에 녹, 황, 홍, 청, 보이, 흑차로 이어지는 역할을 부여했을까. 한꺼번에 그렇게 그은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생각을 설계하는 일을 긋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의 흐름을 어느 정도에서 긋고 하다 보면 이렇게 된다. 혼자 마주할 때 사용하는 작은 차호에서 차담 나눌 때 쓰는 차호로 정리되었다.


백차는 아직 친근하지 않아 빠졌고, 부득불 보이차는 생차와 숙차로 나누어 사용한다. 마침 고무줄이 있어 헷갈리지 않도록 붙잡아 맸다. 감각적으로 다가설 수 있게끔 고무줄 색상에 방점을 두었다. 흑차 차호에서는 검정색 고무줄이 없어서, 주황색 고무줄을 사용한다. 흑차->흙차->흙->황토->황차가 있으니, 유사한 주황색으로 각인한다. 나머지는 얼추 마주쳐서 소리 난다.


처음 차를 시작할 때는 녹차가 전부였다. 그 후 녹차는 섬진다원에서 매년 제다하여 구증구포로 잠깐 한 시절 음차하고 있다. 녹차는 불발효차이지만, 발효 정도에 따라 백, 황, 청, 홍, 흑차로 이어지는데, 나는 이 중에서 황차를 무척 선호한다. 내가 제다한 황차는 매우 구수한 큰 맛을 낸다. 황차는 부모님께 매일 헌다로 올리는 차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대홍포, 동방미인 등의 청차와 정산소종 등의 홍차를 즐긴다. 흑차인 육보차와 안화흑차도 요즘 자주 손이 간다. 보이생차와 보이숙차는 그때그때 몸 상태에 따라 이끌린다. 


엊그제 국내 무이산방에서 제다한 '벽아황'차를 며칠 음차하고 있다. 깔끔한 단맛이 매력적이다. 큰 찻잎으로 제다하여 긴압하여 전차(벽돌차) 형태로 만들었다. 모차를 황차 제다법으로 만들고, 이를 긴압하였다. 모차는 황편으로 만들었다. 발효가 진행되면서 내는 깊은 맛을 기대한다.

-이천이십년 이월 열나흗날, 여언재에서 月白쓰다.

매거진의 이전글 긴압 후발효 황차와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