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지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 나무
나무에게 다가서는 여행의 시작
첫 시집에는 유난히 나무가 등장한다. 예감했듯이 내 삶이 어느 순간 나무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특별하게 나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을 꿈꾼 적은 없다. 내 시에 나무가 많다는 것을 태생적 한계라 여긴 적도 있어, 의식적으로 나무의 등장을 줄여보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꽤 많은 사람이 나무에게로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나무 공부, 이제 시작인 것이지.」
하면서 외면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그런 식물적 사유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춘문예 따위의 각종 등단 작품에 노골적으로 나무가 등장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가능하면 생업으로 고난스럽게 함께 하는 나무를 훔쳐보지 않노라고 스스로 되뇌고 있었다.
외우고 분별하고 구별하여 알고 있다 다시 지워지는
그러던 나는 어느새 새로운 측면에서 나무를 공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스스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여 직업으로서 생활을 시작한1986년 9월 이후이다. 부끄럽지만 그때는 소나무 종류 조차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곰솔, 심지어는 잣나무, 스트로브잣나무 등을 그저 소나무류라고 했다. 들은 풍월은 있는데 대체 이를 외우고 분별하는 게 무슨 소용 있을까 했다. 또 구별하여 알고 있다가도 며칠 지나면 다시 지워지는 게다. 나무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대한 너스레와 심리적 기작에 대하여 관찰하는 일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주로 사람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 집중한 시절이기도 하다.
내가 변해야 나를 만나는 대상도 변한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도 제대로 마음 두고 본 적이 없었다. 일찍 꽃부터 피우는 개나리, 진달래, 아주 큰 꽃인 백목련 정도의 나무나 꽃을 피울 때야 아는 척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삶의 지장 정도가 아니라 대오의 각성이 생겨난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고는 나를 만나 나의 이야기를 듣는 대상을 변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스로 자연의 위대함에 대하여 책을 읽으면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내게 자연은 나무로 대변되는 환경의 연속이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교보문고를 다니면서 몇 안 되는 식물 관련 서적을 구입하는 일이 계속된다. 스스로 사상적으로나 생활인으로서 다져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자꾸 다가서니 나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당시 나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를 공부한지 6개월 만이다. 이미 모든 주말은 광릉수목원, 서울대안양수목원, 천리포수목원 등으로 오가는 일에 맡겼다. 여주에서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걷곤 하면서 그 일은 자석처럼 나를 이끌었다. 그때 내 애인은 나무인 것이 분명했다. 자다가도 어떤 나무를 공부하다가 벌떡 일어나 다시 책을 찾아보곤 했다. 임경빈 선생의 '나무백과'라는 책은 복음이었다. 아주 곱게 모셔 놓고 읽곤 했다. 지금도 나무이야기는 그 이상인 것을 찾지 못한다. 임경빈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실제로 시집을 한 권 출판하신다. '나는 나무입니다'라는 시집이다.
나무를 통하여 세상을 빗대는 대화술이 개발되다
그때 나는 나무를 주제로 시를 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나무를 통하여 세상을 빗대는 대화술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그때 나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신선함이 있었다. 마악 시작된 다양한 사회적 긴장을 덜어 내면서 다른 절대자의 입인 나무의 육성을 빌려 부드럽게 전개할 수 있는 화법인 것이다.
내 안에 나를 이끌었던 황금주머니의 반짝임
모감주나무는 비교적 일찍 내 안에 자리한 나무이다. 자생수목이면서 조경수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나무로 점 찍었던 나무이고 종자 채취 후 파종하여 새 생명을 수없이 받아 낸 나무이다. 지금은 흔하지만, 그때 이 나무를 아는 사람 많지 않았다. 노란색 꽃이 피었다가 그 자리에 꽈리로 열매가 만들어지는 나무다.
꽃이 피어 / 아 꽃이 피었구나 했다 / 그 사이에 / 있고 없음 / 묻고 답함이 스쳐갔다 / /그 꽃이 / 살짝 입힌 노란색 꽈리로 / 새 옷 입은 것을 보고서야 / 꽃은 지는 게 아닌 것을 / 꽃이 하나인 것을 / / 내 눈길이 / 젖어 있었다 (온형근 시집,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모감주 나무》)
이 시는 살고 죽음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나무와 함께 자연을 읽고 함께 하면서 만들어진 사생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살고 지는 게 어디까지가 사는 거고, 여기서부터가 지는 게다라는 구별이 뭉그러졌다. 모감주나무 한 그루에 천지가 담겨 있었다. 내 안도 그랬다. 꽃이 졌을 때, 나무가 끝난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 생명이 담겨져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는 것도 꽃을 피우는 게고, 죽는 것도 꽃을 피우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말로 혹은 글로 깨달은 게 아니라, 모감주나무와 몇 년 동안 만나고 비비고 어루만지며, 열매 맺고 생명을 만들어 내고 하면서 하나된 노릇이다. 아름다움은 열정을 지니고 있고, 그 열정은 반드시 반사되는 것을 배운다. 따신 것들은 메아리가 있다. 삶에 대한 젖은 시선은 죽음 조차 반짝이게 한다.
바닷물을 따라 바닷가에, 바닷가를 따라 자란다
모감주나무Koelreuteria paniculata Laxm.는 중국이 원산지이다.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에 있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제138호이다. 군락 길이는 120m이고 중간 부분 너비는 15m 정도이며, 해안의 돌과 자갈로 덮인 곳에서 바닷가를 따라 자란다. 낙엽소교목이어서 과수원같이 보이며 방풍림의 역할을 한다. 포항 영일 발산리 모감주나무 군락은 동해안을 내려다보는 곳으로 경사 급한 암석지에 모감주나무 3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러한 모감주나무 자연 식생은 희귀하여 학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한국의 식물』의 저자인 이영노는 모감주나무의 열매가 해류에 의하여 한국 해안 및 일본의 해안에 전파된 것이라는 학설을 1958년에 발표하였다. 김태정은 『155마일 야생화 기행』에서 백령도 탐사시 바닷가에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만났다 했다. 백령도에 자라는 모감주나무는 휴전선 이남에서 가장 북쪽에 자라는 나무가 되었다.
모감주나무는 야위고 수척한 모가난 꽈리를 가졌다
모감주나무의 한자 이름이 재미있다. 난수欒樹라고 한다. 난은 둥글 란, 모감주나무 란으로 읽는다. 둥글고 야위어 수척하고 쌍둥이이며 가름대와 모서리, 방울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모감주나무를 지칭하는 글자다. 안덕균의 『한국의 약초』에는 모감주나무의 꽃을 난화欒華라 하고 그 맛은 쓰고 약성은 차다 했다. 열을 수반한 안질환과 안구충혈에 응용된다고 했다. 반면 영명은 Goldenrain tree이다. 원추화서의 꽃이 지는 모습이 하늘에서 황금 꽃비가 쏟아지는 모습과 흡사한 것에 주목하여 네이밍 되었을 것이다.
모감주나무의 꽃과 열매는 시각적 연속성을 안겨준다
모감주나무의 꽃은 노란색이지만 중앙부는 적색이다. 모감주나무는 바닷가에서 시작하여 사찰과 마을 주변에서 자라고 있다. 잎 가장자리에 불규칙하고 둔한 톱니가 있고 밑 부분은 얕게 갈라졌다. 잎은 어긋나고 7∼15개의 작은 잎으로 된 1회 우상복엽이다. 꽃이 지면서 곧바로 꽈리 모양의 열매가 맺히는데,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열매가 삭과로 맺힌다. 삭과는 '튀는 열매'로 부르는데, 햇빛에 종자를 싸고 있던 꽈리 같은 껍질이 벌어지면서 열매가 튀어 나오는 종류를 말한다. 종자는 까맣고 둥글며 윤채가 있어 염주로 만든다. 무환자나무 종자와 혼동되기도 한다.
모감주나무 열매로 만든 염주가 얼마나 좋은지
모감주나무 열매로 만든 염주를 가지고 싶어 하는 두 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꽤나 정다운 사이이고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었지만 탐욕은 예측하지 못한 파국으로 몰고 간다. 기승전결이 교훈적이다. 좋다는 분별이 생기는 순간 마음은 움직인다. 그 마음을 잡지 못하니 천 길 낭떠러지기도 보이지 않는다.
옛날 강원도 발연사鉢淵寺에 여러 스님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젊은 비구승 계인戒人과 지상知相은 도반으로서 정다운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때에 지상은 남쪽에서 온 어떤 스님으로부터 목에 거는 모감주 백팔 염주 한 벌을 선물로 받아 가졌다. 이 모감주는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중간치로서 새까맣게 생긴 것인데 윤이 나서 반들반들한 것이라 누구든지 보는 사람은 탐을 내어갖고 싶어 하였다.
지상은 그것을 애지중지 아끼고 자나 깨나 목에 걸고 벗어놓지를 아니하였다. 그런데 계인대사는 몹시 탐내어 가지고 싶어 하였다. 어느 해 봄날 계인은 지상에게 절 뒷산으로 올라가서 소풍이나 하자고 권하여 천 길 만길이나 되는 험준한 산봉우리에 앉아서 놀게 되었다. 이때 계인은 지상을 바라보면서
「자네 그 염주 좀 구경하세.」하고 말을 건다. 지상은 무심하게 생각하며
「밤낮 보던 염주인데 왜 여기 와서 새삼스럽게 보자고 하는가?」
「공연히 보고 싶어서 그러네.」
「그러면 잠깐만 보고 다시 돌려주게나.」하고 목에 걸었던 염주를 벗어 주었다. 계인은 염주를 받아 만져보며
「참 곱게 생긴 염주야! 이것을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
「농담 말게, 내가 그것을 생명같이 아끼는 것인데 자네를 주겠나!
다른 것을 줄지언정 염주만은 줄 수가 없네.」
「정말 줄 수가 없어?」
하면서 고함을 치더니 계인은 별안간 지상을 발길로 차서 천 길 만길 되는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고는 혼자 염주를 가지고 절로 내려왔다. 그러나 혹시 죄가 탄로 날까 두려워서 바랑을 짊어지고 절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지상은 절벽에 떠밀리는 순간 <악!> 소리를 지르며 떨어졌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중간쯤에서 바위틈에 자라난 큰 측백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생명만은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정신을 차려서 살펴보니 위아래가 천야만야 절벽으로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죽으나 사나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불렀다. 비몽사몽 간에 웬 노장 한분이 나타나더니
「여보, 젊은 대사가 염주 한 벌의 애착 때문에 욕을 보게 되었구려. 탐착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나도 <발연사>에 있던 화주승化主僧이었는데 시주 돈을 거두어서 절을 다시 중창重創하려다가 내 돈도 아닌 공금임에도 역사役事를 벌리면 그 돈이 없어지는 게 아까워서 다락 속에 감취 놓고 차일피일 미루어 오다가 신벌神罰을 받아서 큰 구렁이가 되어 이 낭떠러지 밑에 살고 있소.
내가 대사를 구해 줄 테니 절에 들어가거든 내가 하지 못한 불사를 이룩해 주시기 바라오. 그리하면 스님도 좋고 나도 좋지 않겠소. 내가 구렁이 몸으로 기어 올라가니 대사는 내 등을 타고 꼭 붙잡고 놓치지 마시오. 그리하면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서 내려놓을 터이니 절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내가 부탁한 것은 꼭 잊지 말고 시행하여 주시기 바라오.」
라고 한다.
지상은 꿈에서 깨어나 이상하게 여기면서 낭떠러지 밑을 내려다 보니까 시커먼 괴물체가 기어올라 오는 것이다. 그 물체가 가까이 기어 올라오는 것을 보니 대들보 만한 먹구렁이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올라오더니 타라는 듯이 등을 들여대는 것이었다. 지상은 꿈 가운데서 부탁을 받은 일이 있으므로 징그럽기는 하지만 우선 살 욕심으로 구렁이 등에 올라탔더니 구렁이가 떨어지지 않게 꼬리로 지상의 몸을 감싸고 슬금슬금 기어 올라간다. 급기야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서 평지에 내렸다.
지상은 구렁이에게 절을 하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후 구렁이와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감사한 마음 그지 없소이다. 스님의 소원을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시행하리다.」
하고 사지에서 살아났던 것이다.
절에 돌아와 공루公樓에 올라가서 채독을 열어보니 시주의 방함록과 함께 엽전 수백 냥이 노끈에 꿰어져 구렁이처럼 서리고 있었다. 지상은 대중에게 공포하고 이 돈을 꺼내어 발연사를 중건중수重建重修하고 낙성회향재落成廻向齋를 올리었다. 또 이를 위하여 지장기도地藏祈禱까지 올려서 천도하였다.
그랬더니 구렁이는 다시 꿈에 본 노장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지상에게 치하하고
「나는 덕택으로 구렁이 몸을 벗고 천상으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계인대사는 이 소문을 듣고 지상을 찾아와서 염주를 돌려주며 지난 일을 참회하고 사죄하였다. 이 때 지상은
「이 염주 때문에 서로 본의 아닌 죄를 지은 것이오.」라고 말하며 염주를 불에 태워버리고 나서 그들은 <중은 절대로 고귀한 물건을 가질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애착이나 탐욕할 것이 아님을 서로 다짐>
하였으니, 이로부터 그들은 신심을 돈발하여 후에 고승이 되었다고 한다.
(權相老文集)
꽃처럼 아름다운 처녀의 신표인 모감주 염주
『한국신소설대계 1편』의 이해조의 《화세계》에는 꽃처럼 아름다운 처녀 ‘수정’이가 사주단자밖에 받은 적 없고 얼굴조차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다가 종내는 경성으로 직접 찾아 나서기까지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대목이 있다. 수월 스님은 모감주나무 염주를 몸에 지녀 보물과 패물이 든 견대를 찾으러 왔을 때의 비표를 삼자고 했다. 수정은 수월 스님이 준 모감주나무 염주를 지녔다가 자신의 보물을 찾으러 보내는 사람에게 비표로 쥐어 보내면 되게끔 한 것이다. 여자의 마음이 한번 인연을 맺으면 삼 척 비수로도 끊기 어렵고 천 근 철퇴로도 바수기 어렵기 때문에 길을 나서는 것이다.
수정이가 새벽 되기를 기다려 길을 떠날새 허리에 띠었던 견대를 끌러 수월암을 주며, "이것을 홀로 나선 여자 몸에 지니고 가다가 무슨 위험한 일을 당할는지 알 길 없사오니, 어려우시나 스님께서 갖다 두셨다가 모월 모일에 제가 찾거든 내어주시며, 스님께서 긴급하신 일이 있거든 아무 고기* 말으시고 몇 가지든지 마음대로 내어 팔아 쓰시옵소서."
수월암이 그 견대를 받으며,
(수월) "이 애, 그렇지 아니하다. 이 속에 각색 보패 있은 것은 거번에 강변에서도 보았다마는, 적지 않은 재물을 송장이 거진 된 내가 맡아 있기도 조심되고, 또는 이것이 경보*가 되어 네 몸에 지니고도 아무 데를 못 갈 바 아니니 천부당한 말 말고 이왕 모양으로 네 옷 속에 단단히 간수하고 가거라."
(수정) "이왕이라 지니고 있었지요마는 어찐 곡절인지 마음에 실쭉하오니, 어려우시나마 스님께서 아직 맡아 두시면 아까 하시던 말씀과 같이 소승이 내려오든지 사람을 보내든지 좌우지간 할 것이니 그때 보내주셔요. 에구, 그도 저도 소식이 없거든 소승이 세상에 뜻이 없어 물에라도 빠져죽은 줄 알으십시오."
(수월) "네가 정 고집을 할 터이면 나를 맡기고 가기는 해라마는, 만일 네가 못 오고 사람을 보낼 터이면 무슨 신적*이 있어야 서로 믿을 터이니 이것을 간수하였다가 주어 보내어라."
하며 손목에 걸었던 모감주*를 벗겨 수정을 주더라.
여자의 마음이라는 것은 한번 맺으면 삼 척 비수로도 끊기 어렵고 천 근 철퇴로도 바수기 어려운 것이라. 그러므로 천성에 용납지 못한 바가 되어 삼엄한 의리도 능히 지키고 악착한 죽음도 왕왕 생기는 것이라. 수정이가 몇 차례 죽기를 결심하고 한번 잡은 지조를 변치 아니함은 한갓 구참령을 저버리지 말고자 함이라. 생전에 기어이 소식을 알아볼 작정으로 연약한 여자로 풍우를 무릅쓰고 천 리 경성 머나먼 길을 죽장망혜*로 올라오는데, 낮이면 길을 걷고 밤이면 주점에 들어 부지중 며칠이 되었던지 남대문 밖을 당도하였는데, 그때는 지금과 같지 아니하여 승의 복색으로 성중에를 들어오지 못하는 법이라, 사람을 만나는 대로 길을 물어 밖 남산으로 돌아 동문 밖 청량리 승방에 와 유련*을 하게 되었더라.
* 고기(顧忌): 뒷일을 염려하고 꺼림.
* 경보(輕寶): 몸에 지니고 다니기에 편한 가벼운 보배.
* 신적(身迹): 몸의 흔적.
* 모감주: 모감주나무의 열매. 여기서는 모감주나무의 씨로 만든 염주를 가리킨다.
* 죽장망혜(竹杖芒鞋): 대지팡이와 짚신이란 뜻으로, 먼 길을 떠날 때의 아주 간편한 차림새를 이르는 말.
* 유련(留連): 객지에 묵고 있음.
아버지와 아들의 시공을 잇는 읍취정 입구 모감주나무
전통 조경을 공부하다 보면 정영방의 영양 서석지가 나온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위치한다. 정영방은 광해군에게 실망하여 은거하면서 서석지를 조성하여 경영하였다. 연못을 중심으로 큰 정자인 경정이 있고 그 옆의 주일재 앞에는 연못쪽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을 만들고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었다. 연못을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가졌다. 읍취정揖翠亭은 정영방이 영양에서 안동 송천으로 돌아와 선어대 아래에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는 안동 8대 경승의 하나인 선어대를 바라보며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정자 입구에 모감주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선생의 아들이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서 옮겨 심은 것이라 전한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은거하며 살던 연당리의 풍물을 하나 보태주려는 아들의 세심한 마음씀이 나무 옮겨 심는 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