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 지닌 것들은 가지 뻗은 거리만큼 날며 떨어진다

토종을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워주는 나무

by 온형근

개울과 집 사이 급경사 언덕의 고욤나무


가을이면 한 번씩 오랜만에 만나는 모임이 있다. 올해는 강원도 홍천 서석면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는 선배와 후배들이 함께 자리를 했다. 그야말로 1박 2일의 만남이다. 공직에서 정년 하여 집을 짓고 터를 잡은 선배의 집이다. 집 아래에는 근사한 개울이 흐른다. 맑고 시원하여 심성을 다스리기에 안성맞춤이다. 개울과 집 사이 급경사의 언덕에는 고욤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여름이면 종일 서성대며 시간을 가질 수 있을만한 곳이다. 물론 가을의 정취도 남다르다. 저녁에 각종 음식을 차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답게 건배사를 연호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느릅나무01.jpg 고욤나무는 알맞은 규모의 크기를 지녀 시선의 친근한 맛을 안겨준다.

'토종'과 친환경 청정 먹거리


돌아와 며칠 동안 즐거움이 가시지 않는다. 개울의 너럭바위를 감싸주던 고욤나무의 공간감이 행복했다. 그래서 나무는 서 있는 자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제자리에 심겨진 나무는 한껏 우주를 유영하듯 기품이 돋보인다.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 중에 토종 유실수에 대한 대화가 그럴듯하게 와 닿는다. 한 선배가 산돌배나무, 개복숭아 등을 위주로 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한쪽에서 친환경 청정 먹거리에 대한 관심으로 토종 유실수와의 접점을 찾는 기웃거림이 전개되었다.

토종은 개량종에 밀려 없는 듯 존재감을 지녔었는데, 토종이라는 것 자체가 농약이라든가 인위적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들이다 보니 그러한 먹거리 트렌드와 결부되어 새로운 가치를 찾게 되는 위치에 놓인 것이다. 그만큼 잃어버린 토종에 대한 문화적, 경제적 관점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얼었다 녹았다 까맣게 변하여 익었을 때


내친김에 고욤나무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한 내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일까 한다. 개인적으로 고욤나무 열매를 채취하여 노천매장하였다가 파종하여 새로운 개체를 생산한지 3-4년이 지났다. 일부는 여주에 성장하고 있고, 올해 파종한 것은 다시 수원에서 자라고 있다. 고욤나무는 겨울에 나무에 매달려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까맣게 변하며 익었을 때, 이를 단지에 담았다가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 꺼내 먹곤 했다. 잘 익은 고욤을 따서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어두면 발효가 되어 걸쭉한 죽처럼 되는데 겨울철 고욤을 먹는 맛이 남다르다. 그런 기억들이 보통 사람들의 고욤이라는 열매에 대한 추억이다.

고욤나무의 열매, 겨울동안 매달려 얼고 녹고 하면서 까맣게 변한다.
고욤의 상상력


무게 지닌 것들은 잽싸게 빈자리로
가지 뻗은 거리만큼 날며 떨어진다
낙엽은 휘둘려 고욤을 덮는다
그 집 안에서 생명은
오순도순 앉은걸음으로 종종거린다
이 아침의 생기는
까맣게 얼었다 풀리기를 되풀이하는
틀어 앉은 아침 햇살에
눈부신 고욤이 장가가는 잔치

(온형근 시집, 『고라니 고속도로』)

고욤나무의 열매는 맛이 달고 떫으며 성질은 서늘하다


고욤나무의 열매는 맛이 달고 떫으며 성질은 서늘하다. 설사를 멈추게 하며 소갈증을 해소시키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열이 많은 증상을 제거시켜 주고 피부를 윤택하게 한다. 소변이 많아지고 고혈압과 중풍에도 치료 효과가 있다. 고욤의 탄닌 성분이 심전도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혈압을 뚜렷하게 내리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 임상 실험에서 밝혀졌다. 열매는 둥글며 노란색에서 검은색으로 익는다. 『삼명시화』에서는 고욤나무의 열매를 양조羊棗라고 하였다. 노란색이면서 어두운 자줏빛이 난다고 하였으니 노란색에서 검은색으로 익어가는 과정이리라. 이를 말린 것을 군천자君遷子라 하여 소갈이나 번열증에 쓴다고 한다.


수박씨를 즐겨 먹는 아버지와 고욤나무 열매를 즐겨 먹는 아버지


『삼명시화三溟詩話』는 조선의 삼명三溟 강준흠이 최치원이 해인사 입구 바위에 남겼다는 시를 시작으로 19세기 초반까지, 시 127편에 얽힌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여기서 시화詩話는 시와 그에 얽힌 일화를 곁들여 품평한 글을 묶은 책이다. 이광사가 유배지에서 「딸이 보낸 수박씨에 답한 시[答女兒西瓜子]」가 있다. 여기에 고욤나무 열매인 양조羊棗가 나온다. 늦둥이 아들을 둔 내게 이 시는 읽다 절절하여 가슴이 앞 뒤로 꽉 막힌다.

변방이라 계절 더뎌 과일도 늦게 나니
칠월이 되어서야 앵도 붉게 익는데,
관북에는 무산茂山 땅에 수박이 난다지만
금년에는 장마로 다 썩어 버렸구나.
이곳 사람들 손을 들어 두 주먹 합치며
“큰 놈은 이만하다”고 자랑하기에,
늘 술항아리 만한 수박을 보아온 터라
듣자마자 머금은 밥알이 뿜어졌구나.
평소에 나는 수박씨 먹기를 좋아하여
양조羊棗*와 비슷하다 혼자 웃었지만,
수박 구경도 못했으니 씨야 말해 무엇하리
여름 내내 속절없이 내 이빨만 심심했네.
서울서 온 아이가 수박씨 한 봉지를 가지고 와
어린 누이가 멀리서 보내드린 것이라 하기에,
즐겁게 이빨로 까서 껍질을 뱉어내고
홍색 백색으로 널려진 모습을 보는구나.
네가 이걸 고이 담아 보낼 적에
나를 그리며 눈물 줄줄 흘렸겠지.
먹을 때마다 씨 모으느라 얼마나 마음 썼으며
아침이면 내어 말리느라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늘 지켜서 계집종이 못 훔쳐 먹도록 했고
갈무리할 땐 새언니에게 부탁하곤 했으리니,
예전에 무릎 위에 널 앉히고 함께 먹었거늘
오늘 이렇게 헤어져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이 아이 늦둥이로 얻어 끔찍이도 사랑했으니
두 눈썹 그린 듯이 귀여웠고,
병든 어미를 간호함에 뜻을 잘 맞추어
응대에 민첩하여 번거롭게 가르친 적 없었었지.
부모는 너를 세상에서 진귀한 보배로 여겨
자랑하느라 입에 침이 말랐으며,
좋은 배필을 골라 노경에 낙 삼고자 했더니
뉘 알았으랴, 나이 여덟에 부모와 헤어질 줄.
생이별한 나는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한데
네 어미 너 버리고 차마 어찌 떠났을까!
땅 밑에서도 두 눈 감지 못하리니
가슴을 터놓고 말하려다 문득 그만 두노라.

수박씨와 고욤나무 씨가 비슷하다

유배지의 이광사에게 늦둥이 딸이 수박씨를 보냈다. 그 사연이 너무 절절하다. 추운 지방 사람이 두 주먹 합치며 수박 자랑을 한다. 매번 술항아리 만한 수박을 보던 이광사는 먹던 밥알까지 내뿜으며 웃을 수밖에 없다. 수박씨 먹기를 좋아하는 아버지다. 수박씨와 고욤나무 씨가 비슷하다 여긴 것을 보면, 추운 지방인 유배지에는 감나무는 추워서 재배되지 않고 고욤나무를 쉽게 보았던 모양이다. 수박씨는커녕 주먹만 한 수박도 먹어보지 못하는 유배지에 딸이 보낸 수박씨는 아버지로 하여금 회한의 정경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한다.


번거로움, 수고로움, 정성스러움의 마음씨

무릎 위에 앉혀 늦둥이 딸과 함께 먹던 수박씨다. 귀엽고 민첩하여 뜻을 잘 맞추어 주던 딸 아이다. 수박씨를 먹는 방법이 상세하다. 이빨로 까서 껍질을 제거하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이걸 널어 말린다. 붉고 흰색 섞인 풍경이 널려있다. 말려 고이 담을 때, 딸 아이는 얼마나 울었겠는가. 씨 모으는 마음씀, 내어 말리는 번거로움, 지켜 내는 수고로움, 갈무리하는 정성스러움을 한결같이 느낀다. 그 딸 아이 나이 겨우 여덟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참형 소식에 지레 자결했고, 아버지는 유배지다. 가슴이 먹먹하여 더 말을 잇지 못한다.


아버지가 즐기는 고염나무 열매

'양조'라는 말은『맹자』 「진심하盡心下」에 "증자는 일찍이 자기 아버지 증석이 양조를 좋아한 까닭에 자신은 양조를 먹지 않았다 [曾晳嗜羊棗, 而曾子不忍食羊棗]"는 말에 나온다. 아버지가 좋아한 모든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즐기는 게 아니라 특별히 기호하는 것에 대한 회상이리라. 당시에도 양조라는 고염나무 열매를 따로 준비하며 즐긴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고염나무 열매를 겨우내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가 먹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고염나무 열매 같이 작고 자극 없는 입맛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고 맛있는 감이나, 더 맛있는 많은 것들로 대체할 수 있기에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겠다. 그러니 양조를 좋아하고 챙기는 일은 따로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준비하고 즐겨야 하는 수고로움이 곁들여 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특별한 기호를 알기에 즐기기에는 그리움의 회한이 더 컸을 것이다. 슬픔에 겨워질 추모의 정을 아껴두는 것이리라.


고욤나무 잎차는 질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더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고욤나무의 잎이다. 감나무의 잎도 감잎차라고 하여 시판되고 있는데,

일찍 감나무의 잎보다 비타민 함량이 더 많은 토종 고욤나무의 잎으로 차를 만들어 시판하는 곳이 있었다. 차를 좋아하다 보니 여러 종류를 마시면서 서서히 내게 어울리는 차를 고르게 되고, 그것이 어느 정도 고착이 되어 감각적으로 차를 선정하여 계절에 따라 혹은 그날의 심리적 기운에 따라 마시게 되는데, 이 고욤나무 잎차는 갈수록 질리지 않고 자주 마시게 된 것이다.

느릅나무02.jpg 고욤나무 파종하여 묘목을 얻다.

고욤나무의 어린 순을 채취하는 것은


그러나 고욤나무의 어린 순을 채취하는 것은 도심 생활에서 쉽지 않다. 고욤나무는 낙엽활엽교목으로 가지가 유연하여 올라서기도 쉽지 않다. 열매를 채취하는 것보다 어린 순잎을 채취하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묘목을 재배하여 잎 채취에 알맞게 수형을 잡고, 생육 환경과 잘 어울리는 곳에 식재한다면 어떨까 하는 관점이 생각의 출발점이었다. 고욤나무의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 또는 긴 타원형이고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꽃은 6월에 피고 연한 녹색이며 새가지 밑 부분의 엽액에 달린다.

고욤나무의 꽃은 단정하게 립스틱 바른 청초함을 지녔다.

‘개’, ‘돌’, ‘산’ 이 붙는 토종의 이름들


고욤나무 잎에는 비타민C와 P가 많이 들어있어 혈압이 높이지는 것을 예방한다. 콜레스테롤을 줄여주며 알칼리 성분으로 피를 맑게 하여 면역력을 높여준다. 많은 토종들이 사라지고 있다. 토종은 선조들과 애환을 같이 했던 문화적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개복숭아도 효소를 담아 이용되고 있다. 보통 토종들의 이름 앞에 ‘개’, ‘돌’, ‘산’ 등이 붙는다. 산돌배 역시 토종으로서 그 기품과 함께 먹거리로서의 새로운 진가를 알리고 있다. 돌배 효소와 돌배주, 돌배 발효차까지 그 쓰임과 용도가 매우 다양하다. 앞으로 개발할 많은 토종 유실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느릅나무05.jpg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되고 있는 고욤나무의 겨울 가지

편안한 생활양식의 순진한 회귀가 복이다


때마침 문화재청은 우리의 생활양식에 관련된 유실수인 '고욤나무'와 '산돌배' 한 그루씩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로 했다. 충북 보은군 회인면 용곡리 우래실에 있는 250년생 정도의 '고욤나무'와 경북 영양군 영양읍 무창리 지무실에 있는 200년생의'산돌배'가 그것이다. 이 나무들은 규모가 매우 크고 수형이 아름다우며, 마을의 당산목으로 보호돼 온 점에서 생물학적 가치뿐 아니라 민속·문화적 가치가 있다. 토종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심은 문화의 복원이며 편안한 생활 양식의 순진한 회귀다. 세상에 많은 복이 있고 인연따라 그 복을 누리고 있겠으나 오래된 미래라 할 수 있는 토종 유실수에 대한 안목이야말로 복 중의 복이다. 새롭고 다정다감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돕는다. 오감을 만족시키고 오미를 향유할 수 있는 복이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남다른 정감을 주는 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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