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고 속살을 내보일 때 압도되는 나무
사철나무가 어울리는 공간은 회양목과도 어울린다
사철나무는 전통마을을 비롯하여 오래된 고가나 사찰, 서원 등에 고르게 심겨져 있다. 그만큼 사상이나 종교 또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나무다. 특히 중부지방은 상록활엽수가 드물다. 겨우 식재되고 있는 것이 회양목과 사철나무 정도다. 둘 다 키가 작은 관목이다. 그러나 오래되면 몸집이 커서 대단한 면적으로 위용을 지닌다. 회양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주 세종대왕 영릉 지역의 회양목이 천연기념물이다. 사철나무는 삼백 살쯤 된 5.5미터의 크기로 경북 청도에 살고 있다.
아녀자와 외간 남자의 시선을 가리는 문병門屛
예전에는 사철나무를 양반집에서 아녀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외간 남자들의 시선과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가리개용으로 식재하였다. 기록에는 이것을 문병門屛이라고 했다. 문에 사철나무로 병풍을 드리운 것이다. 그러니까 늘 푸른 상록수의 생울타리용으로 이용된다. 요즘 사철나무 생울타리가 하나의 유행처럼 많이 식재되는 것도 이런 역사성과 무관하지 않다.
노란색 작은 꽃들은 소박하지만 종일 벌이 앵앵거리며 달라붙는다
꽃은 소박하다. 노란색과 흰색이 섞여 있다. 꽃이라고 하기에는 푸른 가죽질의 잎에 가려 눈에 띄기조차 쉽지 않으나 자세히 보면 꽃에 벌이 엄청나게 달라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회양목도 마찬가지이다. 눈에 보이는 꽃의 아름다움은 특별한 미감을 지녀야 그 가치를 논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벌이 달라붙어 오래도록 윙윙대며 소리 내는 것을 보면 여전히 꽃은 꽃이고, 그렇게 수분이 이루어져 가을에 매혹적인 열매가 맺한다. 아름다움을 익히는 데에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수고로움이 함께 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
감싸고 있는 껍질을 벗고 속살을 내보일 때 압도된다
노박덩굴, 화살나무, 참빗살나무 등과 같이 사철나무는 노박덩굴과에 속한다.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나무들은 가을이 되면 환상적인 열매로 꿈을 꾸게 한다. 이들 몇 가지 꺾어 작은 꽃병에 꽂아 두고 차를 마시는 그 행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홍조를 띤 여인의 얼굴처럼 불그스레한 게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얼굴이 붉어지게 하는 힘이 있다.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는 버금감-둔차鈍次의 나무
경주 최부자집에 들르면 사철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사철나무는 집안에 드물게 심었던 나무다. 보통 마당을 비워두는 전통 가옥에서 사철나무는 모란과 더불어 사랑받았던 나무의 하나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의 할아버지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아버지인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둔차라는 말,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는 버금감이라는 말인데 속으로 통쾌한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1등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속에서 이뤄진다. 1등의 순간부터 계속된 도전과 만난다. 2등은 어떤가.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둔차는 ‘2등을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만족에 관한 말이다.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와 서로 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추운 계절에도 푸른 잎을 매달고 인고의 세월을 받아들인다
사철나무는 반그늘진 곳에서 잘 자라고 잔가지가 많이 나온다. 공해에도 강한 편이다. 사철나무는 가을에 종자를 채취하여 노천매장 후 파종하는데 발아력이 높다. 더군다나 삽목도 잘 되는데, 봄 싹트기 전과 장마 때, 그리고 가을의 9~11월까지 가능하다. 하동 최참판댁에도 커다란 사철나무가 심겨져 있다. 사철나무는 주로 가정 정원수로 많이 이용된다. 그리고 산울타리로 가능하여, 경계식재 또는 차폐식재로 이용된다. 새로 나온 잎이 하얗게 되는 백분병에 걸리기 쉽다. 이때는 카라센을 구입하여 뿌려준다. 또한 봄에서 여름에 걸쳐 자벌레가 많이 발생하여 잎을 갉아 먹는데, 스미치온이나 디프테렉스를 뿌려 준다.
겨우내 눈도 많이 오고 추웠다. 그 추운 계절에도 어김없이 푸른색을 지닌 채 인고의 세월을 끄떡없이 받아들이는 사철나무를 가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희망을 놓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나무다. 인내와 희망의 의미를 사철나무를 통하여 새롭게 다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