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암서재 산수원림
암서재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학문에 정진하고 나라를 위해 고민했던 곳이다.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암서재 주변을 감싼다. 암서재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뜬다. 암서재 주변의 반석군은 밤새도록 쌓였던 이슬을 머금고 촉촉하게 반짝인다. 맑은 계곡물은 새벽 공기를 깨우는 노래를 부른다. 동녘에서 붉은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곳곳의 구곡원림을 따스한 빛으로 감싼다. 암서재는 그 빛을 받아 더욱 뜻이 높고 고상하다.
우암은 일찍 일어나 얼굴 부위의 혈을 주무르며 하루를 연다. 요즘따라 눈이 흐려져 눈 부위를 더욱 세심하게 어루만진다. 눈이 환해지자 암서재 누마루로 나아가 멀리 산봉우리로 서리는 화양구곡의 숨결을 깊게 호흡한다.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에 잠긴다. 이윽고 일어난다. 선 채로 몇 번 소주천(小周天)1)을 돌린다. 마음을 가라앉힌다. 새소리와 함께 깨어나는 와석, 암벽, 물고기의 활기찬 모습을 바라본다. 헛기침을 한 번 길게 하자 주변으로 펼친 각양각색의 실존은 암서재를 향해 경의를 표하는 듯 고요하다. 암서재의 아침 조회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암서재의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는 따뜻한 용기와 영감을 안겨준다.
화양구곡 암서재 원림의 오후는 따스한 햇살이 산 너머에서 비스듬히 비추며 주변을 은은하게 감싼다. 넓은 암반군이 마치 시치미를 떼고 여기저기 흩어져 각자의 이야기에 골몰하며 속삭인다. 여기저기 툭툭 제 사연을 풀어놓는다. 순서 없이 나서며 먼저 말하려던 암반은 암서재 앞에 우뚝 서 있는 '금사담(金沙潭)'의 위엄에 움츠러든다. 다시금 말할 순서를 자체적으로 정리한다. 곧 질서 정연하게 차분해지는 중층으로 쌓인 암반에서 세월의 관록을 느낀다. 계류의 물소리에 이력이 난 암반군은 나이 많고 덕망 높은 원로들의 귀한 모임처럼 점잖다.
암서재 주변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이다. 푸른 산과 하늘 사이로 흘러내리는 햇살은 계곡물에 반짝이며, 맑은 물결은 노랫소리처럼 흥얼댄다. 암서재 앞뜰 산자락을 끼고 수직 절벽처럼 오래된 암반이 우뚝 서 있다. 그 아래에는 급류가 채질하는 웅장한 화강암 암반이 매끄럽다. 화양구곡의 자연은 암서재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 그리고 형형색색의 바위가 조화를 이룬다.
화양구곡의 푸른 산과 맑은 계곡 사이에서 암서재는 고요한 위엄을 드러낸다. 그러나 암서재 안에 앉아 있는 우암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깊은 한숨을 쉬며 왼쪽으로 몸을 틀어 북쪽을 향한다. 효종 임금이 부재를 체감한다. 숙종 임금이 함께 일하자 하였지만 뿌리친 것을 생각하며 씁쓸하다. 마땅히 조정에 나가 뜻을 펼치고 못다 한 북벌의 꿈을 이루어야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치닫는 시샘과 모략에는 답이 없다. 한 시대를 이성으로 산다는 것이 이토록 욕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고뇌한다. 남모르게 속으로 세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수긍할 수밖에 없다. 화양구곡의 아름다운 풍경도 이런 날의 슬픔을 달랠 수 없다. 맑고 선명한 산과 청량하고 초롱초롱한 계곡이 오늘따라 흐릿하다. 암서재 누마루에 나아가 멀리 바라본다. 먼 산도 괴로운지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걱정한다. 고독과 고뇌를 되새기며 울창한 숲의 고요한 분위기에 젖는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시끄럽다. 일찌감치 공성신퇴(攻成身退)하고자 하였다. 딱히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하지만 세상과의 거리는 철저하게 유지하며 지낸다. 도잠(陶潛, 365~427)을 떠올린다. 도잠은 마흔에 귀거래사를 쓰고 원림에 들어앉았다. 공자(孔子, 551 B.C~479 B.C)는 마흔이면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암은 공부가 끝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다. 더구나 명나라가 멸망한 시대에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지키는 것은 조선의 몫이다. 조선이야말로 꼿꼿한 정신의 우월성을 지켜야 한다고 고뇌한다.
세상이 모두 무너져도 조선만은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삼강오륜을, 대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회 곳곳에 심어야 한다. 이 지독하리만큼 명료한 정신의 우월성을 어찌 탓하겠는가. 다시 암서재 누마루에 나아가 저 멀리 오래도록 바라본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 웅혼하다. 우암의 고민도 웅장하고 묵직하다.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붉은 노을이 암서재를 물들이고, 맑은 계곡물은 밤의 노래로 바꾼다. 오늘 하루를 되돌아본다. 짙게 물든 세월 속에서 우암은 조선 후반의 사대부 정신을 한 곳으로 몰아간 거인이다. 적어도 실학의 기운이 새로운 조선을 읽기 시작하기까지는 그랬다.
암서재를 바라보며 긴 숨을 쉰다. 바위와 물결, 새와 물고기가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존주대의를 말하고자 입꼬리를 치켜드는 순간 세상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바위는 무심하고 물살은 더욱 세진다. 때로는 고요할 정도로 조용하다. 새는 열심히 날아 새끼를 부양한다. 물고기는 정신없이 분주하다. 바람과 달은 늘 은은하여 곁에 두고 벗 삼을만하다. 우암에게 이곳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수양의 공간이다. 암서재 원림은 단순한 거점 공간이 아니다. 우암의 정신을 오롯하게 담은 시대의 고뇌와 포부를 종횡무진으로 펼친 공간이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후학들이 이곳을 찾았던가.
옛사람의 구곡문화와 주자학의 정신에서 산수 원림 문화의 원형을 살핀다. 거점 중심 공간으로서의 구곡 문화를 떠올린다. 동아시아 산수 원림 문화의 꼭지점이라 불리는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2)이 있듯이 ‘화양구곡(華陽九曲)’을 다녀왔다. 옛 선조들이 꾸려나간 구곡 문화에는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담은 거점 중심 공간이 존재한다. 무이구곡 5곡 대은병(大隱屛)에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다면 화양구곡은 제4곡인 금사담에 ‘암서재(巖棲齋)’라는 중심 공간과 그 주변을 둘러싼 '구곡원림'으로 구성되었다. 암서재는 정신 수양과 학문 연구의 장으로 활용되었으며, 구곡원림은 다양한 자연 경관을 담은 아름다운 산책이 가능한 ‘낮게 읊조리며 천천히 걷는’ 행위를 즐기는 ‘미음완보(微吟緩步)’의 공간이다.
조선 유학사에서 주자학이 차지하는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거울뉴런’과 ‘카논뉴런’으로 접근한다. 거울뉴런(mirror neuron)은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거나 모방할 때 활성화된다.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방 행동, 감정 이해, 언어 습득, 사회적 상호작용 등에 관여한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고통을 마치 내가 느끼는 것처럼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다. 카논뉴런(canonical neuron)은 특정한 행위로 행동할 때 활성화된다. 행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거울뉴런’이 타인 행위의 관찰에서 활성화된다면, ‘카논뉴런’은 보는 것만으로 그 물건과 관련된 감각 및 운동영역이 활성화된다. ‘거울뉴런’과 ‘카논뉴론’은 별개로 작동하지 않고 연합하여 뇌의 감각과 운동영역의 활성에 관여한다. 이 둘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나 대상과의 상호작용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무이정사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은 ‘거울뉴런’의 작용을 보여준다. 스승의 말투와 제스처를 닮아가는 학생은 스승의 정신과 가치관을 이어받는다. 이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스승과 제자의 정신적 연결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문적 전통의 계승을 말한다. 구곡원림을 따라 펼쳐지는 다채로운 자연 경관은 ‘카논뉴런’을 자극하여 창조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영감은 시, 그림,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 산수 원림 문화의 핵심 가치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유교, 특히 주자학은 학문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친다. 주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학문의 방향을 다잡아 이어나가는 과정은 ‘거울뉴런’의 작용을 잘 보여준다. 스승의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 제자는 스승의 사고방식과 학문적 태도를 닮아가며 주자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정신적 연결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문적 전통의 계승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은 동아시아 산수 원림 문화의 정점이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신 수양을 하는 공간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 산수 원림 문화의 핵심 가치를 보여준다. 무이구곡의 설계에는 ‘카논뉴런’의 작용이 엿보인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다양한 자연 요소들을 연결하고 조화롭게 배치하는 과정은 ‘카논뉴런’의 창조적 실천 행동이다.
도잠은 중국 동진(東晉)시대의 시인으로, 자연에서의 은일(隱逸)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산수 원림의 삶을 추구하는 그의 사상을 잘 담고 있다. 「귀거래사」는 관직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심정을, 「도화원기」는 한 어부가 복숭아꽃이 핀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갔다가 발견한 이상적인 세계를 묘사한 작품이다. 산수 원림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삶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감을 추구한다. 산수 원림을 즐기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동아시아의 산수 원림에 대한 관점은 ‘카논뉴런’을 활성화하여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 발현한다.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행위의 ‘카논뉴런’은 소상팔경 설경 문화와도 연결된다. 소상팔경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8가지 경관으로 선정하여 묘사하는 문화이다. 소상팔경 설경 문화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감성과 예술적 표현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이때도 ‘카논뉴런’은 재현을 위한 설계와 행위로 활성화한다. 오늘날 한국 중년층이 가장 많이 시청한다는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은 동아시아인에게 내재한 DNA인 산수 원림 문화를 ‘날것’으로 보여준다. 단순한 오락 프로그램을 넘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정신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몸으로 정원을 꾸미는’ 원림 문화의 잣대라 할 수 있다. 가령 당(唐) 왕유(王維, 699~759)는 ‘산거추명(山居秋暝)’에서 “명월송간조(明月松間照) 청천석상류(清泉石上流),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물은 바위 위로 흘러간다”고 시를 읊었다. 시를 통하여 형상을 떠올리고, 정신은 그 곳에서 노닐며 쉴 수 있는 원림 조영의 원리가 싯귀를 통하여 ‘카논뉴런’으로 활성화된다.
조선의 주자학과 동아시아 산수 원림 문화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거울뉴런’과 ‘카논뉴런’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거울뉴런’은 정신 유산의 계승을, ‘카논뉴런’은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 두 가지 신경세포의 상호 작용은 동아시아 산수 원림 문화의 풍요로움을 형성하였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화양구곡’이 그러하다. 오늘날 속리산 국립공원에 위치한 명승 ‘괴산 화양구곡’을 말한다. 화양천을 따라 3㎞에 걸쳐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며 설정되었다. 경천벽(擎天壁), 운영담(雲影潭), 읍궁암(泣弓巖), 금사담(金沙潭), 첨성대(瞻星臺), 능운대(凌雲臺), 와룡암(臥龍巖), 학소대(鶴巢臺), 파곶(巴串)이 화양구곡이다. 암서재는 제4곡 금사담에 지어진, 무이구곡의 무이정사처럼 거점 중심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괴산에 위치한 화양구곡은 조선 후기 대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삶이 녹아있는 곳이다. 정조(正祖, 1752~1800)가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편찬하여 공자-주자-송자의 도통을 이은 성인으로 공인된다. 화양구곡의 가장 유명한 유적은 바로 '비례부동(非禮不動)'3)과 '옥조빙호(玉藻氷壺)'이다. '비례부동'은 명나라 의종(毅宗, 1611~1644)의 어필로, 예절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암이 공부하던 암서재 건너편 첨성대 암벽에 새겼다(1674년). '옥조빙호'는 신종(神宗, 1563~1620)의 어필로, 옥처럼 맑고 투명한 절개와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는 '비례부동' 옆에 홈을 파고 '옥조빙호'를 안치했다(1717년).
화양구곡은 단순한 자연경관을 넘어, 송시열의 숭고한 정신과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도통의식을 계승하는 성지가 되어 순례자와 그들의 문장이 남는다. 화양구곡은 송시열의 제자인 단암 민진원(閔鎭遠, 1664~1736)에 의해, 지금과 같은 위치와 명칭을 전서로 바위에 새겨 오늘에 이른다(1727년경). 물론 민진원의 화양구곡 설곡 이전에도 화양동의 산수경관에 대한 아름다움을 평론한 것이 있지만 설곡 이후, 우암의 지명도에 따른 ‘경관평론’이 대부분이다. ‘경관평론’4)의 의미를 가장 심도 있게 표현한 우암의 다음 글을 읽는다.
무릇 내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조정(朝廷)의 일을 말하지 말고, 감사(監司)나 주현(州縣)의 일도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장단(長短)과 득실(得失)도 말하지 말라. 오직 경사(經史)를 담론하고, 의리(義理)를 분별하고, 산수(山水)를 평(評)하고, 농사일에 대해 말할 뿐이다. 그렇게 한다면 주인된 사람만 일신(一身)을 온전히 보전하여 지하에서 부형(父兄)과 사우(師友)들을 볼 면목이 있을 뿐 아니라, 빈객(賓客)들로서도 다른 사람에게 죄(罪)를 덧붙이게 되지 않아서 허물을 적게 하는 일을 조성(助成)하는 한 단서가 될 것이니, 천만번 깊이 살필지어다.
-송시열, 「화양동객위자목」, 『송자대전』 제132 권, 잡저, 한국고전종합DB.
우암이 화양동 처음 들어간 해가 1666년 병오년이고 이 글은 1680년 경신년에 작성된 것이다.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판국이 바뀐 해인데, 우암은 암서재에 오는 사람은 쓸데없이 미주알고주알 ‘일 이야기’를 하지 말라 말한다. 다만 경사를 담론하고 의리를 분별하며 산수를 평론하고 상마(桑麻, 농사)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다. ‘평산수설상마(評山水說桑麻)’는 우암의 「월천회화록서」에도 등장한다. 산수에 대한 평론과 농사일을 걱정하는 것은 동시대 사대부의 기본 덕목이다.
우암의 화양구곡 거점 공간인 암서재 원림의 경관평론을 추론하면 다음과 같다. 최신(崔愼, 1642~1708)의 『학암집』에 「화양견문록·어록」으로 실려있는 글이다.
병오년(1666년) 가을부터 先生이 화양동에 자주 계셨는데, 맑은 못, 하얀 암석, 폭포, 푸른 절벽을 사랑하여 말씀하시기를, “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 산의 못이 맑은 것은 초록빛으로 푸른 색이요. 돌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 산의 너럭바위(盤石)은 즉 맑고 희니, 지극히 사랑스럽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한밤중에 온갖 소리가 고요할 때, 누워서 창 사이로 청량(涼涼)하게 물소리를 듣노라면 고요한 가운데 역동성을 머금은 뜻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파곶(葩谷)은 선유동(仙遊洞)의 그윽하고 깊숙함만 같지 못하고, 선유동은 파곶의 평평하게 펼쳐지고 탁 트임만 같지 못하다. 사람의 타고난 자질과 학문이 서로 동일하지 않은 것 또한 이와 같은 것이 많다”’고 하셨다.
-송시열, 「최신록(하)」, 『송재대전』부록 권 18, ‘어록’, 한국고전종합DB.
우암은 이곳의 맑은 못, 하얀 암석, 폭포, 푸른 절벽인 ‘징담백석폭포창벽〔澄潭白石瀑布蒼壁〕’을 사랑하였다. 초록으로 푸른(綠碧) 물과 맑고 흰(潔白) 암반이 지극히 사랑스럽다〔極可愛也〕고 강조한다. 고요한 밤에 창으로 서늘하게 들리는 물소리로 정중동(靜中動)을 떠올리며 산수 원림의 평론을 전개한다. 아울러 ‘파곶’과 ‘선유동’을 비교하여 평론한다. ‘그윽하고 깊숙함’과 ‘펼쳐진 탁 트임’을 키워드로 경관론을 펼치고 사람의 자질과 학문으로 연계하여 평한다. 이는 산수 원림에서 품성을 함양하는 관조의 방법론으로 마땅하다.
화양동(華陽洞) 수석(水石)의 훌륭한 경치가 호남ㆍ영남 가운데 으뜸인데, 우암 선생이 병오년에 정사(精舍)를 그 시내 남쪽에 지으니, 참으로 세속 밖의 그윽한 지경이다. 정사의 동쪽으로 한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가파른 석대(石臺)가 있는데, 그 높이가 수십 척(尺)이 되고,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하니, 이 또한 천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여기에 3칸 소재(小齋)를 짓고 수시로 여기에서 유식(遊息)하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
그 대(臺) 아래는 깊은 못이 있어 충분히 뗏목도 배도 띄울 만하였으므로, 가끔 일엽편주를 띄우고 물결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물이 밑바닥까지 환히 보이도록 맑아서 물고기를 하나하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밤에 헌창(軒窓)을 기대고 있노라면 마치 낮과 같이 환한 달빛이 영롱하게 서로 비추어 수정세계(水晶世界)를 방불케 하였다. 선생이 여기에서 지팡이를 끌고 시문을 읊으면 소리가 금석(金石) 같았고, 언뜻 세속 밖에 우뚝 서 있는 듯한 생각이 있었으니, 무이정사(武夷精舍) 띳집의 맑은 흥취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우세했을까.
(…)
옛날에 반도(蟠桃) 한 그루가 바위틈에 나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노승(老僧)이 일찍이 암자 뜰에서 종자를 취해 두었는데, 가을이 되면 예전과 같이 많이 심을 것이라고 한다.
숭정 후 신축년 5월 일에 문인 권상하는 삼가 기록한다.
-권상하, 「암서재중수기」, 『한수재집』한수재선생문집 제22 권, ‘기’, 한국고전종합DB.
암서재는 수십 척의 높이와 백여 명이 앉을 정도의 커다란 암반에 지은 3칸짜리 작은 정자이다. 지금 암서재는 2칸은 방이고 1칸은 마루이다. 암서재 앞의 계곡물은 안정되게 맴돌며 깊은 못을 이룬다. 그래서 이곳을 금사담이라 부르는 것이다. 반짝거리는 모래가 돋보이는 깊은 곳이라 배를 띄워도 된다. 배에서 내려보면 맑은 물 속의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다 셀 수도 있다. 암서재 창에 기대면 달빛이 영롱하여 마치 맑은 수정세계에 든 듯 영롱하다. 우암은 시문을 읽고 사상을 일구어냈다. 주자의 무이정사와 비교해도 전혀 흥취가 모자라지 않다. 바위틈에 3천 년 만에 한 번씩 열린다는 신선의 복사나무인 ‘반도(蟠桃)’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암서재 원림을 서성대며 시를 하나 읊었다. 요즘처럼 춥고 시끄러운 시국일수록 깐깐했던 어른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온형근
날이 쌀쌀해지니 깐깐했던 어른이 그립다.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화두를 놓지 않는다.
요즘처럼 시도 때도 없는 말 바꾸기 놀이에 진절머리 난다.
꼬장꼬장하여 시종일관하는 어른은 다 어디 있는가.
이럴 때면 우암 송시열이 떠오른다.
조원동 원림을 미음완보하다가
갑자기 겨울 초입의 화양구곡이 보고싶다.
귀마개와 목도리, 장갑을 챙긴다.
계곡 바람이 진세의 발열을 쓸어 내린다.
차가운 물기가 얼굴을 때리며 깊은 숨을 낸다.
계곡의 바람은 싸늘하게 젖은 겨울 물살을 간질거린다.
차갑게 언 볼을 이즈러지듯 씰룩이며
나도 파문으로 젖고 싶다.
우암은 화양구곡을 경영하면서 누구를 용서하였을까?
결국 자신을 궁극의 수양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암서재를 거점으로 삼아
계절을 달리하며 구곡을 풍경으로 체화한다.
깐깐함과 꼬장꼬장이
화양구곡의 풍광에 절어 깊은 풍미로 숙성한다.
그의 초상화가 그렇다.
-2024.03.05.
특정할 때 유난히 더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진다. 흔들리는 가치관을 암서재 원림에서 새롭게 다진다. 우암의 굳은 의지와 깊은 학문을 존경한다. 나를 용서하고 수양하는 깊은 내면의 세계를 수용한다. 아름다운 원림 경관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는다. 차가운 물살을 통해 마음을 정화한다. 풍광이 절어 깊은 풍미로 숙성되는 것은 삶의 원칙이나 가치관의 강직함이다. 매번 우암의 초상화를 보면서 뜨끔하다.
(온형근, 시인::문화유산조경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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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小周天은 인체의任督二脈을 따라 내기가 순환하는 도교 내단술의 기본적인 수련이다. 任脈은 몸의 앞쪽 중앙을 따라 달리는 경맥이고, 督脈은 몸의 뒤쪽 중앙을 따라 달리는 경맥이다. 小周天은 하단전(배꼽 아래 2인치)에서 시작하여 척추를 따라 올라가 머리로 이동한 다음 가슴을 따라 내려와 하단전으로 돌아오는 기의 경로를 말한다.
2) 주자는 1184년(송 효종 순희 11년, 55세) 갑진년(甲辰年) 2월에 사우 및 학생들과 무이구곡을 유람하고 「무이도가(武夷櫂歌)」 열 수를 지었다.
3) 주역 34번째 괘인 ‘뇌천대장(雷天大壯)’에는 ‘비례불리(非禮弗履)’라는 대목이 나온다. ‘군자는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논어에 “예가 아니면 쳐다보지 말고, 듣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는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을 인(仁)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한다. 비례물동의 물(勿)은 불(不)과 같다. 조선 당쟁사의 핵심인 예송(禮訟)은 ‘예’의 적용 문제를 노론과 남인 간에 당쟁으로 몰고 갔다.
4) 산수평론(山水評論)은 산수 유람에 따른 경관미의 감상을 기록하는 산수유기 중, 산수 원림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평가하거나 우열을 촌평하는 등의 견해를 총괄한다. ‘산수에 대한 평론’이란 의미로 ‘평론산수(評論山水)’, ‘논산평수(論山評水)’, ‘논산수(論山水)’, ‘평산수(評山水)’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이런 ’산수평론‘이란 용어를 현대적 용어로 ’경관평론‘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