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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May 19. 2024

사시가경의 변화와 왕버들 묵상

봉화 청암정 산수원림


봉화 청암정 – 사시가경의 변화와 왕버들 묵상     


사시가경의 청아한 정취로 만나는 꿈과 현실              


청암정의 겨울 풍광 (2024.01.18.)

경북 봉화의 닭실(酉谷)마을 청암정(靑巖亭)을 찾았을 때, 속마음은 “이렇게 늦게 이곳에 오다니!” 하면서 회한이 인다. 마땅히 진작 찾았을 승경(勝景)이다. 내 꿈에도 몇 번 등장한 곳이다. 꿈에서 본 풍경은 앞뒤 맥락 없이 “들어가는 입구가 좁은 외나무다리를 아슬아슬 건넌다. 좁디 좁은 곳을 들어간 후에야 별유천지가 펼쳐진다. 계곡의 물이 철철 흐르고 화강암 암반이 춤추는 물살에 세월을 맡기”는 곳이었다. 막상 와보니 꿈 풍경과 전혀 다르다. 그 꿈은 어떤 연유로 내게 다가와 오래도록 발길을 머물고 있었는가. 누군가에게 스치던 인연의 끈이 영혼에 엉켜 혼재하였던 게다. 소박한 서재인 충재(冲齋) 주변 흙살이 살짝 질다. 배수 잘되는 토질은 아니다. 청암정은 거대한 거북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건립 초기의 이름인 구암정(龜巖亭)의 연유이다. 청암정의 경계는 울창한 숲이 안팎을 가린다. 충재 쪽마루에 앉아 청암정을 마주하며 인사를 나눈다. 

    

닭실마을 청암정

온형근               

   

   연못 물 빠져나가니 생생하게 용트림하던 왕버들

   누웠으나 등골을 바로 세워 위로 솟게 한 새 줄기

   지상을 디디고 활개 편다.

   한 자 반 돌다리를 막아선 대나무 울도 섧다.

   많은 것이 지고 피니 새로 갈 길을 찾는 게 마땅  

   

   청암정 정자를 등에 인 거대한 암반의 거북은

   대체 곁을 내주지 않을 듯 장엄한데

   못을 이룬 석축 호안 주변 낙락장송과 왕버들은 몇 번의 환골탈태를 꿈꾸었을까

   지극 간단한 일자형 돌계단 위를 지나면

   청암정 계자 난간 붙잡고 우물마루에 앉아 사시가경四時佳景으로 어울린다.    

 

   울긋불긋 가을 묵상은 예고했을까 한 겨울 맵시

   암벽을 뚫고 돌다리 건넌 단풍나무에게 묻는다.

   먼 풍경이 가까운 사람의 온도만 할까    

   내성천에서 발길 돌린 가계천으로 들락대던 멧비둘기

   너의 울음 가닥에 실린 정한을 다잡아 묻는다.     


-2024.01.18.     


연못 물이 빠져나가 바닥까지 훤하다. 청암정 거북바위의 전신이 드러난다. 그 자리에 용트림으로 비틀어진 두 그루 왕버들(Salix chaenomeloides)의 힘겨운 세월이 수행 마친 고승처럼 빛난다.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 웅장했던 위용을 간추려 뼈대만 보여준다. 고귀한 경지에 도달한 장엄의 기품이라 평온하고 겸손하여 깨끗한 영성이 솟는다. 거대한 암반은 절묘한 섬이다. 섬은 정자의 3배 정도 크기이다. 석축 호안의 오래된 소나무와 전나무가 고귀한 시간의 역사를 아로새긴다. 조산(祖山)인 문수산으로 길게 목을 뺀다. 연못 위를 가로질러 정자로 다가서는 일자형 석교(石橋)는 선계의 하사품이다. 석교의 폭은 한 자 반 정도로 딱 한 사람씩 건너라 이른다. 단아한 아름다움의 결정체다. 신선계로 넘어오라는 일갈처럼 군더더기 없이 단호하다. 단호함에도 깊은 권유의 미학이 배어 있음을 울림으로 안다. 청암정의 계자 난간을 붙잡고 정자마루에 앉는다. 이 자리가 청암정의 사시가경(四時佳景)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단풍나무는 아름다웠던 날을 떠올리는 권능을 제어한다. 내성천에서 날개를 펼친 멧비둘기가 가까운 석천정사 뒷산으로 날며 맑은 울음소리를 남긴다.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따사로운 온도가 실렸다. 산 능선을 한참 올려보다가 내려온다.     


정자 북쪽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한 길이 넘는다. 돌의 색깔이 더욱 푸르고 오래되어 보인다. 그래서 청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선조 충정공이 실제로 이곳을 창건하였다. 모두 여섯 칸의 대청과 두 칸의 방이 있다. 처음에는 방이 없이 대청만 있었다. 증조부 초계공이 허공에 돌을 쌓아 늘렸다. 정자는 그리 크지 않지만,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매우 시원하다.    

-권두인, 「청암정기」, 『하당집』제 4권, ‘기’, 한국고전종합DB.     


‘청암정기’의 충정공은 충재 권벌(權橃, 1478~1548)로 닭실마을의 입향조이자 중종 21년(1526)에 정자를 지었다. 종택은 아들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 1517~1591)와 손자 석천(石泉) 권래(權來, 1562~1617)가 증축하였다. 명승으로 지정된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은 권벌의 아들과 손자의 내력이다. ‘청암정기’는 충재의 5세손인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이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마루 팔작지붕의 정자이다. 여기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마루방인 근사재(近思齋)를 ‘T’자형으로 연결하였다. 정자 대청마루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청암정(靑巖亭)과 미수(眉壽) 허목(許穆, 1595~1682)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인 전서 ‘청암수석(靑岩水石)’ 현판이 걸려있다. 명사들이 주고받은 인문의 흔적으로 한층 더 감동이다.  


봉화 청암정 대청마루에 걸린 편액, 1 : 청암정, 2 : 청암수석, 3. 근사재

             

옥소 권섭과 하당 권두인의 청암정 만남     


‘청암정기’를 작성한 권두인과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이 만났다. 조선 최고의 경관 평론가라 할 수 있는 권섭은 세심한 관찰과 정확한 산수 묘사로 유명하다. 수많은 곳을 유람하고 빼어난 경관에 대한 탐미를 일련의 「유행록(遊行錄)」으로 남겼다. 산수 원림과 의식의 표출을 작가적 관점에 따라 평론하였다. 그중 「동남행추기(東南行追記)」는 1704년 3월 2일에 출발한 약 28일의 기록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이다. 봉화의 청암정을 답사하면서 61세의 권두인을 만나는 장면이다. 둘의 나이 차는 28살이다. 권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봉화에 들어가 청암정을 보고, 삼계서원에 가서 참배하였는데, 권두인이라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와서 , “나는 청암정 주인으로 마침 출타 중이어서 마중을 못했는데, 우연히 서원을 지나다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들어왔습니다.” 하여 함께 앉아 종일토록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노인이 “영춘 관아에 있을 때, 풍기 군수 홍경렴과 황강에 묵게 되었는데, 저녁에 그대 백부댁에 찾아가 인사드리고 친절한 가르침을 받다가 한참 뒤에 돌아오니 홍경렴이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나를 매우 나무랐는데, 내가 그 사람 말을 들었겠습니까? 다음날, 또 인사드리고 물러났는데, 오래지 않아 체관이 되었고 죽령에 막혀 다시는 뵈올 길이 없어 슬프더니 이제 존장의 조카를 만나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듣지 못한 것을 많이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권섭, 「동남행추기」,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 민속원, 2008, 293쪽.     


권섭의 「동남행추기」를 보면, 당시 청암정은 권두인이 운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두인은 기사환국 이후 49세(1692년)에 영춘 현감직을 수행한다. 영남 남인에 속하면서 노론의 지도자인 권섭의 큰아버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만나 친절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이다. 위의 글에서 “황강에 묵게 되었는데, 저녁에 그대 백부댁에 찾아가”의 ‘황강 백부댁’이 권상하를 말함이다. 권두인은 영춘 현감 재직시 명소와 알려지지 않는 새로운 명소를 시경으로 많이 남겼다. 영춘은 ‘사군산수(四郡山水)’의 하나로 권상하는 청풍(황강)에, 권섭은 제천에 살았다. 권섭과 권두인이 나이 차와 당색을 떠나 종일 나눈 이야기는 산수 평론일 것이다. 두 사람의 산수 평론은 사군산수로 시작하여 물꼬를 트고 끝없이 이어진다. ‘듣지 못한 것을 많이 들으니’ 서로 기쁘고 행복하다는 사연이다. 권섭은 4세(1675년)에 홍천 범파정을 시작으로 이후 끊임없이 경관 답사를 다녔다. 86세(1757년)의 노구를 이끌고 113일 동안 2,280리를 다닌 「동유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4세에서 86세까지 다닌 경관 답사는 실로 전무후무한 놀라운 일정이다. 그리고 88세(1759년)에 졸한다.     


청암정기의 원형경관과 정원의 음덕인 푸른 그늘     


내가 찾은 날은 연못에 물이 없었다. 연못에 물이 없으니 ‘청암정기’의 내용인 “물이 잔잔하여 푸른 옥처럼 맑다(湛湛然如碧玉)”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물에 어리는 담담한 풍경을 볼 수 없다. 기억이라는 회로를 작동하여 상상한다. 청암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석교 주변은 대나무 울을 만들어 출입을 제한한다. 울로 만든 문에 자물쇠도 달아 걸었다. 연못 주위의 식생이 울울창창하다. 서쪽은 온통 향나무가 군식처럼 이어져 바깥에서는 청암정이 보이지 않는다. 충재의 쪽마루에 앉으니 바위와 청암정이 암녹색 향나무 숲을 배경으로 두드러지게 우람하다. 연못 주변 식생 중 느티나무, 전나무, 회화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왕버들은 압권이다. 석교를 지나자마자 손님맞이 단풍나무 두 그루가 접객의 격조를 안긴다. 원림의 접객 식재 기법을 몸소 연출한다. 세월의 풍파에 내맡긴 고풍스러운 나무의 품격은 미소 풍만한 포용의 넉넉함을 닮았다. 청암정의 전체적인 식생 구조는 조심스럽게 세대 교체를 준비해야 한다. 갱신과 재구조화는 ‘청암정기(靑巖亭記)’나 ‘유곡잡영(酉谷雜詠)’ 등의 원형 경관을 고려하여 현재의 식생에 반영한다. ‘청암정기’에 기록한 식생과 지금의 식생은 세월만큼 차이를 지녔다.     


청암정에서의 조망은 거북바위 위에 단을 놓아 지었기에 멀리 보인다. 그러나 “남쪽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정자 아래에 이르러 돌에 부딪히며 내달리는 소리가 쏟아지듯 요란”하다는 ‘청암정기’의 내용과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조영 당시의 경관이 지금까지 향유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원형 경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고 들뜬다. 다시 ‘청암정기’를 통하여 원형 경관을 살핀다.     


동쪽으로 물을 끌어와 남쪽 담을 뚫어 연못으로 통하게 하였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데, 정자에 누우면 밤새도록 귓가에 사랑스럽게 들린다. 정원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어 푸른 빛깔이 구름을 덮어 가린다. 나무그늘이 정원을 드리운다. 단풍나무 숲이 양쪽에 있어 비록 한여름 정자의 오후라도 시원하다(庭中有大柟樹 翠色拂雲 童童蔭庭. 夾以楓林 雖盛夏亭午). 연못에는 물고기와 연이 있어 꽃의 붉음과 연잎의 푸름이 구름처럼 일어난다. 맑은 바람이 살살 불어올 때마다 향기가 스민다. 앞에 펼친 논밭이 들판에 가득하고 농부의 노래가 들리는 빼어난 승경이 펼쳐진다. 

닭 밝은 밤이 가장 좋다. 만물이 고요하고 연못은 하늘을 비춘다. 가는 비늘 물고기가 때로 뛰어오른다(纎鱗或躍). 물새가 수시로 운다(水鳥時鳴). 소나무 그림자가 누각에 가득하고(松影滿樓), 띠끌 하나 도달하지 않아(一塵不到)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시원하고 상쾌하게 하여(令人爽然) 꿈조차 없게 한다(無夢寐)  

-권두인, 「청암정기」, 『하당집』제 4권, ‘기’, 한국고전종합DB.(필자 풀어씀)     


청암정에서 가장 좋은 때는 달 밝은 밤이다. 고요 속에서 뛰는 생동과 소리, 어리는 그림자, 맑은 공기로 상쾌하다. 정원에 큰 나무(大柟樹)가 있어 청암정을 그늘로 채운다고 했다. ‘나무의 푸른 빛깔이 구름을 덮어 가린다’는 취색불운(翠色拂雲)이 ‘푸른 그늘’이다. 녹음 식재 기능을 ‘취색불운’으로 멋지게 표현하였다. 여기 남(柟)은 녹나무를 말하고 남(枏)의 속자라고 한다. 일단 남수(柟樹)는 대형목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녹나무는 봉화 지역에 자랄 수 없다. 이곳에서 짙은 녹음수로 정원을 가득 채우는 나무는 느티나무이다. ‘나무 그늘로 드리운 정원이 주는 음덕’이 동동음정(董董蔭庭)이다. 정원의 공적은 나무 그늘 드리우는 것이니 ‘여름 정원’을 상대적으로 궁구한 용어이다. ‘동동음정’은 녹음수를 예찬하는 한국정원문화의 귀한 유산이다. 권두인과 6촌 형제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은 「유곡잡영 45수」에서 ‘고남(古枏)’으로 시를 작성하였다.  


봉화 청암정 식재현황도

            

오래된 이백 년 느티나무는 古枏二百年 /고남이백년
비옥한 땅으로 뿌리를 내렸다. 結根因厚土 /결근인후토
사월이면 푸른 그늘 드리우니 四月綠陰垂 /사월녹음수
아름다운 기운 정원 동산에 서린다. 佳氣生庭塢 /가기생정오     

-권두경, 「유곡잡영 45수」 ‘고남(古枏)’, 『청설재집』제 7권 ‘시’, 한국고전종합DB.(필자 풀어씀)     


‘유곡잡영 45수’ 연작시는 권두경의 마지막 절필시이다. 조카인 강좌(江左) 권만(權萬, 1688~1749)의 『강좌집』에도 같은 제목의 차운시가 있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백 자 넘게 자라고 古楠百餘尺 /고남백여척
무성한 그늘이 넓은 정원을 덮었다. 繁陰覆廣庭 /번음복광정
은은한 생황 소리 들려오고 隱隱笙竽響 /은은생우향
하루 늦도록 연못 위 정자에 있다. 日夕池上亭 /일석지상정     

-권만, 「유곡잡영」 ‘고남(古楠)’, 『강좌집』제 1권, ‘시’, 한국고전종합dB.(필자 풀어씀)     


권두인의 ‘청암정기’에서는 남수(柟樹), 권두경의 ‘유곡잡영 45수’에서는 고남(古枏), 권만의 ‘유곡잡영’에서는 고남(古楠)이라 하였다. 모두 녹나무를 뜻하지만 옛 글의 표현을 가져와 뜻을 취하였을 뿐, 가지가 무성한 느티나무를 호칭한 것이다. 청암정의 한쪽에 심어 여름철의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는 녹음수 역할을 한다. 청암정 동쪽의 뜰 한쪽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지금 식재 현황도의 느티나무는 새로 심어 자란 것이다.     


명당을 감싸는 궁수의 흐름 신탄천의 풍수     


 청암정으로 가는 길은 내성천(奈城川)에 위치한 삼계교에서 시작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로 접어든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청암정을 찾아 진입하던 운치 있는 방법이다. 계곡 따라 오르다 보면 왼쪽 산기슭에 '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는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동천은 신선이 사는 곳을 일컫는 말로 암벽이 있는 계곡과 소나무가 식재된 골짜기의 기운이 좋고절경인 곳이다. ‘크게 못난 사람’이라는 아호를 쓰는 대졸자(大拙子) 권두응(權斗應, 1656~1732)의 초서체 글씨이다. ‘동(洞)’ 자가 석천계곡의 휘어진 형태처럼 예술이다. ‘청하’는 푸른 노을이다. 푸른 노을은 삼공(三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보물이다. 더 오르면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이어진다. 이런 고요하고 아늑한 경관을 놓쳤다. 철도 건널목 아래로 진입하였으니 참으로 아쉽고 통탄할 노릇이다. 닭실마을의 입지는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을 앞으로는 신탄천이 왼쪽에서부터 마을을 안아 감싸듯이 흐른다. 마치 활처럼 굽어 흐른다 하여 '궁수(弓水)'라고 한다. 이는 풍수적으로 명당을 감아 흐르는 이상적인 물길로 간주한다. 


석천계곡 바위에 초서로 새긴 ‘청하동천(靑霞洞天)’

    

마을의 주산은 문수산에서 뻗어 나온 '백설령'이다. 왼쪽은 청룡이 길게 이어져 마을의 수구에서 멈추는데 '옥적봉'이다. 좌청룡에 해당한다. 오른쪽 줄기는 길게 뻗어나가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방침이'라 불린다. 우백호의 역할을 한다. 안산의 역할은 옥적봉이 길게 뻗어 겸하고 있는 '남산'이 담당한다. 안산과 우백호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수구(水口)인데, 이곳에서 신탄천(앞거랑)과 동막천(서쪽거랑)이 합류한다. 이 수구가 마치 빗장을 걸어 놓은 듯 잘 여며져 있어 '수구관쇄(水口關鎖)'라 표현한다. 이렇게 ‘수구가 잘 여며진’ 지형은 생기가 흩어지지 않고 갈무리되는 최적의 조건인 명당이라 치부한다. 충재종택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모두 함께 살필 수 있다. 이들이 종택을 오붓하고 보드랍게 안고 있다. 닭실마을의 지리적 특징과 풍수적 이상향을 제대로 설명한다.       


주거지 앞은 문전옥답이다. 경작지 앞은 남산이 있어서 아늑하게 둘러싼다. 배후지인 뒷산은 식생완충대 역할을 통하여 미기후를 조절한다. (자료 : 네이버지도에 위치 표시)

       

주거지 앞은 문전옥답(門前沃畓)이다. 경작지 앞은 남산이 있어서 아늑하게 둘러싼다. 배후지인 뒷산은 식생완충대 역할을 통하여 미기후를 조절한다. 좋은 기운이 조절되어 농작물의 수확이 만족스러운 최적 여건을 갖춘다. 특히 수자원 확보에 유리한 지형 활용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신탄천에서 물을 끌어 거주지 앞을 통하여 정자 연못으로 물을 돌린다. 이를 ‘정자보’라고 호칭하자. 정자보는 청암정 연못에 보다 쉽게 물을 채우고 비운다. 정자보의 물은 편리하고 유익한 생활용수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논밭의 관개용수로 사용한다.      


오류선생을 읽듯 용트림하는 왕버들     


청암정의 한겨울 풍경은 빼어난 운치를 지닌 석교와 온갖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삼켜 낸 왕버들로 귀결한다. 둘 다 오랜 수행을 거쳐 인격을 완성한 성자의 군살 없이 매끈한 몸매를 지녔다. ‘취색불운’ 서리는 ‘동동음정’이 청암정 원림의 여름 경관이라면 석교의 차갑고 거친 화강암의 결이 주는 촉감과 용트림하며 금방이라도 비상할 듯한 왕버들 경관은 청암정의 겨울을 대표하는 은유의 표상이다.     

          

충재 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빼어난 운치인 석교와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삼켜 낸 수행 마친 깨달음의 굳은 심지를 보여주는 왕버들 (2024.01.08.)


석교는 물이나 계곡을 건너는 다리로 공간을 연결하는 시설이다. 석교는 음인 물과 양인 돌이 만나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물은 깨끗함의 상징이고 성속(聖俗)을 가르는 경계이다. 다리는 성과 속의 구분인 금천(禁川)을 건너는 역할을 한다. 속계의 때묻은 마음을 버리고 성스러운 곳으로 진입하는 상징이다. 누구나 쉽게 개울을 건너도록 다리를 놓는 일을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다리 위를 건너는 일도 즐겁다. 청암정 석교는 극적인 단순미로 주변을 단숨에 고요의 순간으로 이끈다. 많은 석교가 돌을 다듬어 마구리면을 쌓은 홍예교 또는 목가구식 석조이다. 이들의 다양하고 화려한 형태에 비하면 청암정 석교는 지극히 무미건조한 일자형 직선교이다. 그럼에도 경관의 초점(focal point) 요소로 작용한다. 시선을 집중시키고 공간의 중심 역할과 방향성을 제시한다. 청암정에 개성과 정체성을 부여하며 그 자체로 심미적 가치를 지녀 경관의 미적 가치를 높인다. 다리에 올라 물에 비친 오롯한 자신의 내면을 석교 위에서 한참을 머물며 감상한다.   

  

버드나무는 도연명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서 연못이 있는 원림의 식재 수종으로 등장한다. 집 앞 연못 주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오류선생’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사실상 자신의 삶의 태도와 이상을 그린다. 속세의 속박을 떠나 산수 원림에서 은사의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다. 오류선생은 명예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읽은 바를 궁구하지도 않으며, 술을 좋아하되 검소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았다. 이는 실리와 공명을 쫓는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겠다는 의지이다. 오류가 식재된 공간은 시대의 혼란과 어지러움으로부터 벗어난 공간이다.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이상적 공간이다. ‘오류선생’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청렴하고 우아하며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은사의 심상은 도연명 삶의 태도와 이상과 대체로 일치한다.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인 ‘오류(五柳)’가 주는 의미를 살핀다. 첫째, ‘거울뉴런(mirror neuron)’의 발현인 인정 욕구의 표상이다. 도연명의 은일이 작품의 형상화에 담긴다. ‘오류선생’의 심미적 경험을 작품으로 일치시키고자는 수용의 행위가 창작의 동기로 작용한다. 고려의 이색, 이규보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선의 박인로, 윤선도, 이황 등으로 폭넓게 수용되었다. 참 많은 사대부가 작품에 직접 인용하며 그에 대한 존경과 동경을 거리낌없이 표현하였다. 둘째,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인 ‘오류’의 재창조이다. ‘카논뉴런(canonical neuron)’으로서 ‘오류’이다. ‘오류’는 사대부가 은거하는 곳을 상징하는 실재하는 경물로 연결된다. 실제로 행동화로 옮겨져 원림 공간에 버드나무를 식재한다. 버드나무는 고아하고 탈속적이며 자유로운 은거 생활과 그 공간을 상징한다. 자신이 경영하는 원림 문화에 반영한다. 이때 버드나무는 따뜻한 지역은 왕버들을 사용하고, 왕버들이 월동이 안 되는 곳에서는 능수버들(Salix pseudolasiogyne)을 사용하였다.    

  

청암정에 있는 왕버들도 도연명의 ‘오류선생’을 의경(意境)으로 삼는다. 단순한 처소나 상징이 아니라 사대부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과 이상향을 반영하고 투영한다. 청암정 원림은 승자독식의 냉혹한 현실에서 패자가 살아가는 정신적 지향의 향방을 지침으로 삼는다.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는’ 독립불구(獨立不懼)와 ‘세상을 물러나 있어도 번민이 없는’ 둔세무민(遯世无悶)의 공간이다.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의지하고 기대는 마음의 안식처가 봉화 청암정이다.      

    


(온형근, 시인::문화유산조경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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