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한 소통의 꽃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꽃

by 온형근

연말 연시로 사람들이 몰려다닌다


이때쯤이면 각종 자리에서 많은 건배사들이 쏟아진다. 그중, 가끔은 져주며 살자는 게 괜찮아 보였다. 건배사로 식물 이름이 들어간 것들은 의미도 부드럽고 식물성 사유가 깃들어 있다. 가령 ‘진달래’는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라는 건배사다. 그리고 ‘해당화’가 있다.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사하게’라는 건배사다. ‘진달래’도 참 좋아하는 나무지만, ‘해당화’ 역시 은은하여 남 몰래 좋아했던 나무이다. 더군다나 ‘해가 갈수록’이란 말이 나이를 지칭하는 것이면서도 하나의 진행 과정을 서술하는 말이라 부드럽다.

해당화01.jpg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사하게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은 해당화로 시작한다. 섬으로 발령받은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 바닷가의 풍광, 서울이라는 사연이 함께 어우러져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과 서울이라는 공간적인 대립을 섬 색시와 총각 선생님을 중심으로 만들어 낸 가사다. 왠지 이룰 수 없는, 그러면서 다신 만날 수 없는 슬픔의 정서가 진한 여운을 주는 노래이다. 대학 시절 이 노래는 촌스럽게도, 그러나 흥취해서 다 같이 부를 때 펄펄 힘까지 나는 노래로, 학과의 과가로 애창되었다.


동국이상국집, 이규보의 목작약과 해당 사이


『동국이상국전집』〈제4권-서序-목작약木芍藥〉에 이규보의 해어화에 대한 시가 있다. 당 현종 시대의 침향정 앞에 심은 꽃으로 양귀비와의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 꽃잔치에 이백의 시가 펼쳐지는 광경에서 이규보는 해어화에 대한 시를 남겼다. 이규보는 목작약이라고 했다. 임금의 정원인 금원에 온갖 꽃 다 피었건만, 말을 알아듣는 꽃인 양귀비에 빠져 궁궐의 모든 꽃에 단연 홀로 맞설 만하다는 거다. 그만큼 최고의 찬사를 바친 것이다. 그래서 해어화를 양귀비처럼 대우받는 여자, 미인의 대명사로 은유된 것이다.

향로는 흠뻑 소야거에 젖었는데 / 香露低霑炤夜車향로저점소야거
한 가지 사뿐 새벽 바람에 흔들리네 / 一枝輕拂曉風斜일지경불효풍사
금원의 복사꽃 오얏꽃 다 무색하건만 / 禁園桃李渾無色금원도리혼무색
너만이 말할 줄 아는 궁중 꽃과 맞섰구나 / 獨敵宮中解語花독적궁중해어화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0

그런데 이규보는 이어서 같은 책〈제16권-고율시-해당海棠〉에서 더운 낮에 꽃이 늘어져 있는 모습을 당 현종과 양귀비의 고사를 들어 말한다. 이 이야기는 이백집에도 나오니, 두루 퍼진 동양적 정서일 것이다. 이규보도 그렇게 연상하며 해당화 꽃이 다시 활짝 피기를 바랐다. 꾀꼬리에 의뢰하고 아리따우나 어리석은 교태까지 들먹이며 다시 미소를 머금게 해달라는 것이다.

깊은 잠에 축 늘어진 해당화여 / 海棠眠重困欹垂해당면중곤의수
양귀비 술 취한 때와 흡사하구나 / 恰似楊妃被酒時흡사양비피주시
꾀꼬리 소리에 꿈 깨어 / 賴有黃鶯呼破夢뇌유황앵호파몽
다시 미소 지으며 교태 부리누나 / 更含微笑帶嬌癡갱함미소대교치
ⓒ 한국고전번역원 ┃ 최진원 (역) ┃ 1978
목작약과해당화.jpg 작약(왼쪽), 해당화(오른쪽)

이규보는 똑같은 고사를 빌려 와 '목작약'과 '해당'으로 다르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내용은 둘 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말한 해어화에 대한 시이다. 내용에 충실하자면 현종-양귀비-미인-해어화의 관계 설정이다. 그렇다면 해어화를 굳이 해당화에만 해당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어화는 어떤 식물의 고유명사라기 보다 확장된 의미의 대명사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않았을까.


해어화는 사람 이름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국역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과 광해군은 해어화가 사람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연산군은 간택할 때 본래의 모습을 분칠로 바꾸지 못하게 하고, 해어화라는 사람은 그 중 조금 괜찮으니 이름을 취춘방으로 고치게 전교하였다. 광해군 때는 궁중 의식의 예행연습에 불참한 기생들과 관리들의 처벌을 아뢰는 내용이 있다. 엄하게 독촉하여 참석시켰는데, 기생 해어화는 두세 번의 재촉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해어화의 처벌에 대한 광해군의 전교가 있었다.

해당화03.jpg 당의 현종과 양귀비와의 대화에서 나오는 해어화

해어화는 당의 현종이 양귀비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출발한 말이다. 미인을 해어화라고 부르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기생을 해어화라고 하다가 근대에 와서는 보다 의미가 저속해진 듯 해어화라는 멋진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꽃


말을 잘 하는 것보다 듣는 게 어렵다

하물며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얼마나 좋은가

알아듣는 것은 곧 소통이다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마치 깊이 숨어 있는 꽃처럼 은은하여

맑은 정신으로 찾으려 애써야

소매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다

깊이 숨어 있는 꽃을 찾는 사람에게는

맑은 향이 퍼진다


해당화는 다른 화려한 꽃들과 달리 수수하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 무대를 만든 적이 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해어화'라는 타이틀로 우리 시대 마지막 예기藝妓들이 한 무대에 섰다. 2013년 9월 엘지 아트센터에 올린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최하고 문화재청이 후원한 무대가 진옥섭 연출의 '해어화'이다. 진옥섭은 초야에 묻힌 명인들을 찾아 무대에 올려왔다. 발품으로 찾은 명인의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전통예술연출가로서 다양한 무대를 연출하며 전통예술의 새 판을 열고 있다.

해어화000.jpg 진옥섭 전통예술연출가 '켜켜이 묵힌 것'의 사무침 기록

해어화는 1928년생 장금도와 1931년생 유금선, 1934년생 권명화를 중심으로 기획된다. 세 분 모두 권번에서 가무 학습을 한 마지막 예기이다. 모두 팔십이 넘었는데, <해어화> 무대에 함께 출연하는 전무후무한 공연이었다.

해어화출연진.jpg 전통예술공연 '해어화' 의 장금도, 유금선, 권명화


춤추는 슬픈 어미


장금도는 '춤추는 슬픈 어미, 장금도'라 불린다. '채만식의 『탁류』가 흐르던 군산이란 대처에서 인력거 두 대가 와야 춤추러 나갔던 최고의 예기이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 춤을 접었지만 김제 만경 너머 파다한 춤 소문 때문에 곡절 끝에 다시 선 춤추는 어미이다. 이 살풀이춤이 ‘민살풀이춤’이다. 수건을 들지 않는 맨손으로 춘다 하여 무늬를 넣지 않은 것에 붙이는 '민'자를 넣어 ‘민살풀이춤’이라 한다. 김제 만경에 큰 잔치는 임방울 소리에 장금도 춤이라 했다. 빈손이 공기의 결로 흘러들어가는 광경은 최고의 문양이다. '허공을 헤친 그 흰 찰나 옮길 도리가 없어 아득하다'고 했다.


마지막 동래 기생


'마지막 동래기생, 유금선'은 "평양기생 진주기생 말도 마라, 동래기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풍류 본향 부산 동래를 휘어잡은 마지막 동래기생이다. 가무에 능했으나 한량들의 춤을 추기는 구음을 하다가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지금껏 춤을 반주하는 소리를 한다. 정녕 춤을 부르는 최고의 소리꾼이다. 외가 친가도 그쪽이라 소리를 점지받아 목으로 안 되는 게 없다. 구음口音은 춤을 반주하는 가사 없는 즉흥 소리인데, 목석 같은 몸에서 춤을 꺼내니 춤을 부르는 최고의 소리, "헛간의 도리깨도 춤을 춘다."고 했다.


달구벌춤의 봉우리


'달구벌춤의 봉우리, 권명화'는 전쟁통에 피난한 대구 남산동의 대동권번에서 풍류의 대가 박지홍을 만난다. 박지홍의 소리제자는 여럿 있고 그중 한 사람이 ‘제비 몰러 나간다’의 박동진이다. 춤 제자는 권명화와 최희선이다. 권명화는 대구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으로 지정되어 공연한다. 그의 ‘승무’는 남다르다. 대구 피난시절 국립극장이었던 문화극장에서 추어 피란 온 문화계 인사들이 극찬을 했던 춤이다. 그의 〈승무〉에 소매로 당찬 우조가 서리고, 법열의 북에서 앵도가 똑똑 떨어진다'라고 소개하였다.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당당하다


‘말을 알아듣는다’는 게 평범하지 않다. 국민의 말을 정치가가 알아듣지 못하고, 어른의 말을 아이들이, 아이들의 말을 어른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잘 알아듣겠다고 약속하고 딴소리한다. 알아듣는 일을 일부로 걷어찬 듯 아무렇지 않게 다른 말로 일관한다. 말을 잘 알아듣는, 그래서 갈수록 당당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조직은 행복하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당당해진다. 매일이 살맛나는 세상일 것이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해당화는 바닷가 모래밭이나 산기슭에 잘 자란다. 낙엽활엽관목으로 높이 1.5m 정도 자란다. 그러나 추위와 공해에 비교적 잘 견디며 건조에 대한 저항성도 있어서 숲 가장자리나 공원의 특정 공간에 군집으로 심으면 아름답다.

전남 영광 백수해안도로의 해당화 군식도 그래서 아름다웠다. 꽃은 5~8월에 새로 난 가지 끝에서 자홍색으로 핀다. 그 향기가 좋다. 꽃잎에는 방향성 정유가 있어서 향수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이 꽃잎을 씹으면 입안에 향기가 퍼진다. 그래서 꽃잎을 말려 술을 담거나 차에 우려 마시기도 한다. 예전부터 원산 앞바다의 명사십리 해당화가 유명하다.

경기도 인근 도당굿 사설에 잘 만들어진 정원에 해당화가 만발한 풍경이 나타난다. "한편을 바라보니 송죽이 우거졌네, 또 한편을 바라보니 연못에 비단 같은 금붕어는 여기저기서 놀고 있고, 또 한편을 바라보니 해당화 꽃이 만발하여 해당화야 해당화야 명사십리 해당화야"라는 내용으로 구경꾼을 안녕을 비는 게 있다.

해당화-백수도로.jpg 전남 영광 백수해안도로의 해당화 군식

다산과 그의 제자 황상


해당화를 정원에 심는 것은 다산이 제자 황상에게 지어 준 글에서도 세심하게 보인다. 이 글을 읽고 그대로 따라하면 다산과 황상의 정원이 만들어진다. 황상은 다산에게 주역을 배우던 중 이괘 구이에 나오는 유인幽人의 삶에 매료된다. 다산은 제자 위해 '제황상 유인첩 題黃裳幽人帖'을 지어 주고, 제자인 황상은 훗날 일속산방一粟山房을 조성한다. 당호는 다산의 장남 정학연이 작명하였고, 천하의 광대함을 좁쌀 한 알의 매우 작은 공간에 저장한다는 의미다. 황상에게 일속산방은 평화로운 이상 세계의 공간이었고 한톨의 좁쌀처럼 작았지만 삼천세계의 거대한 우주공간이 자리하는 곳이다. 가난하고 초라하였지만 풍요롭고 자유로웠다. 자연에 동화되며 자족적인 삶을 누렸다. 다산이 제자에게 준 '제황상유인첩'의 내용 중 뛰어는 정원 조성 기법이 나온다.

『다산시문집』〈 제14권-제題-황상유인첩黃裳幽人帖에 제함〉
(......) 뜰 오른편에는 조그마한 못을 파되, 크기는 사방이 수십 보 정도로 하고, 못에는 연蓮 수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기르며, 별도로 대나무를 쪼개 홈통을 만들어 산골짜기의 물을 끌어다가 못으로 대고, 넘치는 물은 담장 구멍으로 남새밭에 흘러 들어가게 한다. 남새밭을 수면水面처럼 고르게 다듬은 다음 밭두둑을 네모지게 분할하여 아욱ㆍ배추ㆍ마늘 등을 심되 종류별로 구분하여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며, 씨를 뿌릴 때는 고무래로 흙덩이를 곱게 다듬어 싹이 났을 적에 보면 마치 아롱진 비단 무늬처럼 되어야만 겨우 남새밭이라고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이도 심고 고구마를 심어 남새밭을 둘러싸게 하고 해당화 수십 그루를 심어 울을 만들어서 진한 향기가 늦은 봄 초여름에 남새밭을 돌아보는 사람의 코를 찌르게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84

전원 생활 또는 산거 생활에서 정원을 조성하는 데, 반드시 남새밭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다산의 실사구시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자신도 그렇게 정원을 만들었고 제자도 그렇게 만드는 것을 글로 써서 주었으니 과히 표준화된 정원 매뉴얼이라 하겠다. 다산초당도 그렇게 만들었다. 연못에 연과 잉어, 남새밭에 각종 먹거리, 양념, 양식거리를 빠짐없이 기록하였다가 실천하는 모습이다. 그 남새밭에 해당화를 심어 남새밭을 돌아보는 사람에게 향기로움을 안겨주라는 말이니 낭만적이다.


삽목이 잘되는 해당화


해당화는 꺾꽂이가 잘된다. 새싹이 트기 전에 전년도 가지를 15~20㎝ 정도 잘라 삽수를 만들어 삽목상에 꽂으면 뿌리가 잘 내린다. 문제는 삽수를 다룰 때 가시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편함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삽목에 들어야 한다.

해당화가시01.jpg 불규칙적으로 빽빽하게 나온 해당화 가시는 강모침이다

나무에 난 가시는 보통 가지나, 엽병, 탁엽, 수피의 일부분이 변해서 만들어진다. 가지의 끝 부분이 침상으로 변한 가시를 경침이라 한다. 석류나무, 자두나무, 아그배나무, 피라칸타, 갈매나무 등이 경침이다. 잎이 가시로 변한 것은 엽침이라고 한다. 매발톱나무, 매자나무, 선인장 등이 있다. 탁엽이 가시로 변한 것은 탁엽침이라고 하는데, 아까시나무, 초피나무 등이 탁엽침이다. 또한 가지 껍질에 불규칙적으로 가시가 무수히 붙어 있는 것을 피침이라 하여 찔레꽃, 장미, 음나무, 두릅나무가 이에 해당한다. 극상돌기라고도 한다. 그리고 해당화와 나무딸기처럼 가지에 난 털이 침으로 변한 것을 강모침이라고 한다. 보통 불규칙적으로 빽빽하게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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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 가득 군락으로 심어 놓은 풍광


자연스럽게 바닷가에 해당화가 피어 있어야 할 풍광이 해수욕장이나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설로 꽉 차 있어서 해당화가 자랄 바닷가 공간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공원이나 학교 등에 군락 식재하면 위풍당당하면서도 섬세한 슬픔의 정서, 화려하면서도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분위기 등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한방에서 해당화는 꽃과 뿌리 등을 다양하게 이용하는데, 말을 아낀다. 내 것이 아닌 재산을 뿌리 채 뽑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에 열매가 익으면 따서 열매 껍질은 다양하게 이용하고 씨만 노천매장 후 파종하면 번식이 잘 된다. 열매 또한 아름다워 관상가치가 높고 곁가지를 전정하여 다듬으면서 관리하면 낮은 울타리용으로 효율적이다.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다양한 모양을 즐길 수 있어 주변 건물과 어울리는 수형으로 창작하여 풍경을 개발해도 괜찮다. 수수한 소통의 나무에 잠시 머물러 본다. 수수한 것이 화려한 것보다 깊은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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