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와 비 오는 아침

형근 씨의 협착소설.0002

by 온형근

집을 나서자마자 척추관 협착증이 끈질기게 신호를 보내왔다. 찌릿한 통증이 허리를 타고 내려온다. 형근 씨는 손에 쥔 '타다체어'를 내려다보았다. 이 지팡이 의자를 펼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비가 오면 누구나 우산을 펼치듯, 통증이 오면 의자를 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텐데. 막상 길 한복판에서 의자를 펴려 하면 알량한 사회적 체면이 앞을 가로막는다.

비가 흩날리는 등교 시간, 아이들은 주저 없이 형형색색의 우산을 펼쳐 들었다. 눈비는 피하는 게 당연하면서, 왜 약함은 드러내면 안 되는 걸까. 타다체어가 버튼 하나로 우산처럼 촤르륵 펼쳐진다면 덜 민망할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아파트 입구를 벗어나 언덕을 조금 내려오자마자, 형근 씨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초등학교 수학교실 앞 담벼락에 타다를 펼치고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출근 산행을 이어가야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으레 테이크아웃 커피가 두 잔씩 들려 있다. 저것이 이 아침의 경건함을 채워주는 현대인의 증표인가 싶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 또 하나는 동료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는 출근길의 나를, 다른 하나는 사무실에 도착해 지쳐있을 미래의 나를 위한 시간차 카페인일 수도 있겠다. 형근 씨는 엉덩이 아래 놓인 의자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다음 발걸음을 뗄 나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으레 테이크아웃 커피가 두 잔씩 들려 있다

의자에 정자세로 앉으니 폭이 좁다. 형근 씨는 엉덩이를 90도로 비틀어 걸터앉았다. 한결 안정적이고 협착 특유의 모서리 통증도 줄어든다. 습기를 머금은 아침 아스팔트가 유난히 번들거렸다.

그때였다. 형근 씨 앞으로 한 여자가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전화기를 붙들고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실종 신고를 하는 중이었다. 어린이집 등원 실랑이 중에 아이를 놓친 모양이었다. 여자는 괴성 같은 소리를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계속 뒤를 돌아보는 그 얼굴에는 체면도, 시선도 없었다.

절실함은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다. 형근 씨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회적 가면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오직 '엄마'라는 본능만 남은 헐벗은 얼굴. 저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 순간, 형근 씨의 시선 끝에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조그만 아이가 잡혔다. 여자가 찾던 그 아이가 분명했다. 형근 씨가 손을 들어 아이 쪽을 가리키자, 여자도 그제야 아이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둘이 만났다. 여자는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고 실종 신고를 취소했다.

그런데 형근 씨의 눈에 기이한 장면이 들어왔다. 엄마는 세상이 무너질 듯 안도하며 흐느끼는데, 정작 아이는 멀뚱하니 서서 그런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입가에는 묘한 지루함마저 묻어났다. 동요가 없다.


'아이가 이미 엄마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구나.'


형근 씨는 속으로 혀를 찼다. 늘 엄마를 골탕 먹이며, 어디까지 하면 엄마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각종 실험을 통해 조종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문득 손주 녀석이 떠올랐다. 어른은 바빠서 아이를 기다려주지 못하지만, 아이는 바쁠 이유가 없다. 아이가 저토록 여유롭게 부모를 관찰할 정도라면, 어른들의 일상이란 게 아이들 눈에 얼마나 두서없어 보였을까.

물론 짐작은 짐작일 뿐이다. 반대로 어른이 아이를 완전히 꿰뚫고 통제하며 편리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도 끔찍한 일이다. 아이를 특정 틀에 가두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 아닌가.

오늘도 이 지팡이와 함께, 관찰과 성찰의 젖은 길을 걷는다


"타다야."


형근 씨는 몸을 일으켜 지팡이를 짚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 형근 씨."


마치 지팡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형근 씨의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물론 그것은 그가 만들어낸 환청이거나, 혹은 이 스마트한 의자에 대한 애착이 만들어낸 상상일 것이다.


"관찰과 조종, 자유와 억압. 그 경계가 참 미묘하구나."


"경계는 늘 미묘한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거겠죠."


형근 씨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다를 탁, 하고 접어 손에 쥐었다. 오늘도 이 지팡이와 함께, 관찰과 성찰의 젖은 길을 걷는다. 빗속에 남겨진 모자의 풍경을 뒤로하고, 형근 씨는 다시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발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