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근 씨의 협착소설.0004
거실로 나선다. 시간은 새벽 5시 30분. 창밖으로는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멀리 광교산의 능선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다. 실내는 정적에 잠겨 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냉장고 컴프레서가 돌아가는 낮은 진동음과, 형근 씨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 관절에서 나는 파열음뿐이다.
기상은 수면에서 이탈하는 것이면서 중력에 노출되는 오래된 재계약이다. 형근 씨에게 이 계약은 불공정하다. 그의 요추 4번과 5번 사이, 척추관이라 불리는 신경의 고속도로는 노화와 퇴행에 막혀 좁아질 대로 좁아져 있다. 신경은 압박받고, 혈류는 차단된다. 직립보행을 위해 진화한 인류의 해부학적 구조가 역설적으로 직립을 형벌로 만드는 순간이다. 형근 씨는 이 고통을 '친구'라고 부른다. 신이 인간을 설계할 때 발생한 명백한 오식(誤植)이다. 형근 씨는 조심스럽게 침대를 짚는다. 그의 손이 허공을 젓다가 무언가를 잡는다.
"(갈라진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일어났나."
대답은 없다. 그가 말을 건넨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현관 입구, 신발장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검은색 물체. 제품명 '타다(Ta-Da) 체어 시리즈 2 프로'. 형근 씨는 그것을 '타다'라고 부른다.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행위는 고독의 징후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의탁하는 도구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형근 씨는 척추를 바로 세우려 노력하지만, 둔부에서 허벅지를 타고 종아리로 내려오는 방사통이 그를 주저앉힌다. 형근 씨는 통증을 느낄 때마다 입술을 깨문다. 아픔은 감각이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의지다. 형근 씨는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내부를 관통하며 수행으로 이끈다. 통증을 적으로 규정하기보다, 함께 가야 할 까다로운 친구로 설정한다.
"(스틱을 집어 들며) 오늘도 또 조원동 원림을 걸어야겠지, 갈 수 있겠어?"
타다는 묵묵부답이다. 형근 씨의 손바닥에 닿는 항공기 등급 알루미늄 합금의 가벼운 장착감으로 위로를 받는다. 짓눌린 척추가 감당해야 할 하중을 덜어주겠다는 기술 공학적 약속을 믿는다. 형근 씨는 타다의 손잡이를 꽉 쥔다.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그립이 손바닥의 굴곡에 완벽하게 밀착된다. 마치 태초부터 그의 손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이제 형근 씨과 타다는 하나의 유기체가 된다. 사이보그적 결합이다. 신체의 보완이 아니라, 확장된 신체로의 진화다.
현관을 나서 1층으로 내려온다. 새벽 공기가 형근 씨의 폐부로 밀려들어 온다. 조원동의 거리는 아직 한산하다. 아스팔트 바닥은 회색빛으로 죽어 있지만, 그 아래에는 수백 년 된 흙의 기억이 숨 쉬고 있다.
형근 씨는 첫 발을 내딛는다. 오른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동시에 왼손에 쥔 스틱을 전방 30cm 지점에 찍는다. '탁'. 경쾌한 타격음이다. 타다의 거대한 미끄럼 방지 고무발이 지면을 단단히 움켜쥔다. 나선형 패턴이 새겨진 고무발은 물 빠짐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새벽이슬에 젖은 보도블록 위에서도 미끄러짐을 허용하지 않는다. 형근 씨는 안도한다. 땅을 신뢰할 수 없다면 한 걸음도 떼지 못한다. 협착증 환자에게 세상은 평평한 평야가 아니라, 언제든 발목을 낚아챌 수 있는 험지다. 도구는 세상과 신체 사이의 불화를 중재한다. 형근 씨는 땅을 걷는게 아니라, 대지를 확고하게 확인하는 중이다.
"(혼잣말처럼, 그러나 타다에게 들리도록) 여기가 원래 다 대추나무 밭이었어. 알아?"
형근 씨의 시선이 회색 콘크리트 건물들을 훑는다. 조원동(棗園洞). 글자 그대로 '대추나무 동산'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대추나무 숲이 무성하여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혹은 조선 중기, 이곳에 정착한 선비 이동일(李東一)의 호 '조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곳은 생명력이 넘치는 땅이었다. 대추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깊게 뿌리를 내리고, 붉고 단단한 열매를 맺는다. 형근 씨는 늙은 대추나무를 떠올린다. 비틀리고 옹이 졌으나,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도시의 개발 논리에 밀려 대추나무 숲은 사라졌지만, 땅의 기운은 여전하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른다. 100미터를 걷자 엉덩이 쪽에서 둔탁한 통증이 신호를 보낸다) 그래, 여기서 말들을 징발했지."
그는 조원동의 또 다른 이름인 '고마청(雇馬廳)'을 떠올린다. 조선 시대, 관원들이 민간의 말을 징발하여 관리하던 관아가 있던 곳이다. 말들의 거친 숨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진동하던 땅이다. 역동적인 질주와 근육의 힘이 지배하던 공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형근 씨는 질주는커녕 직립조차 버거운 상태다. 말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속도의 시대. 척추관 협착증은 속도전에서 탈락한 자들의 병명처럼 들린다. 형근 씨는 속도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빠른 것은 풍경을 삭제하지만, 느린 것은 풍경을 복원한다. 그는 통증 때문에 멈춰 서서야 비로소 보도블록 틈새의 이끼를 본다. 그는 느리게 이동함으로써 세계를 더 깊이 읽는다. 세상을 상세하게 독해한다.
형근 씨의 조원동 원림 입구가 보인다. 서서히 내원재를 오른다. 통증이 임계점에 다다른다. 뇌는 다급하게 앉으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형근 씨의 척추관 협착증 통증은 허리를 굽히고 쪼그려 앉는 응급조치로 이어간다. 타다의 잠금장치에 손을 댄다. 이제 마법을 부릴 시간이다. 고통은 참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것이다. 도구는 그 기술을 제공한다.
"(타다의 레버를 조작하며) 잠깐 쉬자. 너도 힘들지?"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다가 펼쳐진다. 우산을 펴는 것처럼 직관적이고 빠르다. 1초. 단 1초 만에, 지지대 역할을 하던 막대기는 안락한 의자로 변신한다. 이것은 트랜스포머의 변신보다 더 극적이다. 직립의 고통을 앉음의 안식으로 전환하는 기적이다. 형근 씨는 길가 한쪽,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곳에 의자를 놓고 앉는다. 지면에서 50cm의 높이가 절묘하다. 너무 낮아 일어나기 힘들지도 않고, 너무 높아 불안하지도 않다. 앉는 순간, 척추 사이의 공간이 미세하게 벌어지며 신경을 짓누르던 압력을 해제한다. "아..." 형근 씨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고통이 빠져나간 자리에 채워지는 안도의 숨결이다. 그는 앉아서 거리를 본다. 눈높이가 50cm 낮아졌을 뿐인데,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황토의 색상이 서로 다름을 안다. 땅 색깔을 구분하는 것은 직립의 오만함을 버리고 앉음의 겸손함에서 비로소 보이는 미시의 세계다. 형근 씨는 깨닫는다. 협착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세상을 낮은 곳에서 다시 보라는 계시이다.
조원동 원림의 내원재를 지나 숨이 고르게 다듬어진다. 울퉁불퉁한 자연의 길에서 타다의 기능이 더욱 빛을 발한다. 형근 씨는 타다에게 흙냄새와 소나무 향을 맡으라고 속마음을 전한다.
산은 도시와 다른 문법을 요구한다. 도시가 수직과 직선의 공간이라면, 산은 곡선과 경사의 공간이다. 형근 씨의 척추는 직선을 잃어버렸기에, 오히려 산의 곡선과 더 잘 어울린다. 길 양옆으로 소나무들이 도열한다. 직립의 거친 질감으로 서 있는 리기다소나무들 사이에 부드러운 질감의 굽은 적송이 인사한다. 형근 씨는 나무 하나를 붙잡고 숨을 고른다.
"(나무를 보며) 너도 참... 구불구불하게도 살았구나. 재선충 주사까지 맞으면서"
소나무 재선충은 소나무를 붉게 말라 죽게 한다. 산림청과 지자체는 감염된 나무를 베어내고, 파쇄하고, 훈증한다. 드론을 띄우고 AI로 감염목을 찾는다. 생존을 위한 전쟁이다. 형근 씨의 몸속에서도 비슷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신경을 갉아먹는 협착과 그것을 막으려는 약물, 운동, 그리고 의지. 죽은 나무가 쌓이면 산불의 연료가 되듯 방치된 통증은 우울의 연료가 된다. 형근 씨는 걷는다. 걷는 행위는 몸속에 맑은 피를 돌게 하고, 우울의 인화물질을 제거하는 방제 작업이다. 형근 씨는 타다를 짚는 손에 힘을 준다.
경사가 가팔라진다. 형근 씨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다시 타다를 펼친다. 이번에는 등산로 옆 작은 평지에 자리를 잡는다. 숲속에 간이의자가 생겼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타인의 시선이 예전 같았으면 부끄러웠을 것이다. 씩씩하게 아무렇지 않게 올라가는 모습들에 열등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형근 씨는 이제 타인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 타다는 그에게 '멈출 권리'를 부여했다. 이 의자는 최대 136kg까지 견딜 수 있는 견고한 구조이다. 유럽의 표준 테스트를 통과한 안전성을 지녔다. 세상 어떤 비평가의 잣대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의자가 엉덩이를 받쳐준다. 형근 씨는 당당하게 앉아 글을 쓴다. 땀을 식히는 바람으로 숲의 소리를 만끽한다. 산의 일부가 되는 중이다. 산을 오르거나 걷는게 아니다. 산과 함께 호흡하며 머문다. 멈춤은 패배가 아니다. 멈춤은 다음 걸음을 위한 충전이자, 풍경을 소유하는 방식이다.
"타다야, 함께 산을 다닐 수 있어서 고맙다. 너는 산과 나를 중계하는 또 하나의 내 골격이야."
대화는 짧지만 깊다. 형근 씨는 타다를 단순한 물건이 아닌 사물로 대우한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도구는 사용할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난다. 배낭 속에 처박혀 있을 때는 짐에 불과하지만, 펴서 앉는 순간 그것은 구원이다. 형근 씨는 다시 일어선다. 1초 만에 의자는 다시 지팡이가 된다. 접을 때 느껴지는 '착' 하는 체결감. 그것은 형근 씨의 의지가 다시 단단해졌음을 알리는 신호다.
조원동 원림의 중턱에 이르면, 완이재가 전개된다.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는 높이이다. 바람이 시원하다. 형근 씨는 완이재를 내려가면서 생각이 깊어진다. '완이(翫怡)'는 기쁨을 관상하는 고개다. 힘든 고개의 고통을 차라리 즐기자는 뜻이다. 몸의 변화와 쇠락을 비관하는 대신, 그것을 데리고 놀 줄 아는 여유를 떠올린다. 형근 씨는 고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깊은 산속의 풍광이 그대로 살아난다. 완이재에서 멀리 광교산 줄기가 겨울나무 사이로 산봉우리의 뚜렷한 윤곽선이 나타난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작은 인형이 움직이는 듯 작다. 내리막길 내내 삐죽삐죽 직선으로 솟은 리기다소나무만 훤출하다.
"(땀을 닦으며) 여기 바람은... 돈 주고도 못 사지."
혼자 중얼댄다.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한다. 도시의 소음은 멀어지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채워진다. 통증은 여전히 존재한다. 숲속에서의 통증은 도시에서의 통증과 질감이 다르다. 도시의 통증이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라면, 숲속의 통증은 묵직하고 근원적이다. 흙을 밟으며 느끼는 통증은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감각을 제공한다. 형근 씨는 고통을 참는게 아니라, 고통을 자연의 리듬으로 수용한다. 그는 다리의 저림을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현상처럼,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기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미래를 믿는 행위다. 지금 심은 나무가 자라 그늘을 만들 때, 심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무를 심는다. 형근 씨가 오늘 이 길을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일 걸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오늘은 걷는다.
재선충에 시달리는 소나무를 정리할 때가 왔다. 저절로 잘 자라는 상수리나무를 비롯한 참나무류에 더 큰 관심으로 다가서야 한다. 수원북중과 보훈원 사이 짧은 구간 가로수가 내가 본 유일한 상수리나무 가로수이다. 어제 분당서울대병원을 가고 오면서 형근 씨의 눈길이 유난하게 꽂혔던 나무다. 수진과 함께 병원을 다녀오면서 그곳을 지날 때, 수진이 제육백반 잘하는 고향밥상을 이야기를 한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신통방통 동조한다.
형근 씨는 수진을 다시본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툭 터져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형근 씨와 함께 한 하루를 내친김에 소울푸드라는 춘천닭갈비도 함께 먹는다. 고맙고 환송하다. 함께 놀아줘서. 형근 씨는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쉬고 있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다시 아픔을 호소한다. 다행 협착 명품 벤치에 도착하여 타다를 펼치지 않고 앉는다. 한때 고향밥상에 가면 형근 씨 대접을 잘 받았었는데, 언젠가 서옥과 갔더니 알아보지 못하더라.
"교육청 이사 가서 왜 따라가시지 그랬어요."
했더니 "누구지?" 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응답하더라. 그랬구나. 아주 자주 들리지는 않았던 곳이긴 하다. 잊힌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동시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기억은 유한하고, 관계는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형근 씨는 한때의 손님에서 과거의 손님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그러하다.
오른쪽 무릎이 땡긴다. 나서자. 다시... 또.
이번에는 500미터 걷고 다시 타다를 펼쳐 앉는다. 플랭카드를 보니, 중학교 졸업식과 수일고 신입생 소집일이 겹쳤다. 꽃장수가 도열한 길을 보며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것들도 하나의 풍물임을 미소짓는다. 건널목 한 가득 학생이 웅성댄다.
주사치료 이후 효과는 있지만 연구소까지 완주는 안 되고 있다. 예전에 형근 씨는 완주가 많았는데 지금 상황이 낯설다. 과거와 비교하지 말자. 지금 여기, 이만큼 걸은 것으로 충분하다.
특정 위치에서 특정인을 또 본다. 그는 담배를 환상적으로 음미한다. 그 폼이 쩐다쩔어. 어쩜 저렇게 꿈나라를 들락대듯 홀망하게 담배를 달게 피울까. 저 사람에게 저 담배는 큰 의지처이겠다. 각자의 의지처, 각자의 위안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내일은 길 건너 장안구청으로 다녀야겠다.
연구소에 와서 돌아본다. 오늘 장갑은 크고 덥다. 잘못 집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모자는 머리카락을 납작하게 한다. 형근 씨는 머리를 매만진다. 겉옷을 벗어 걸고 어제 가져갔던 한자 쓰기 책을 정리한다. 이 책은 행서가 아니라 행해서이다. 나는 행서나 행초서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