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받은 순간, 비는 그쳤다

형근 씨의 협착소설.0010

by 온형근

형근 씨의 협착소설.0010 — 우산을 받은 순간, 비는 그쳤다


“하늘이 희뿌연 게, 그래도 비는 안 오겠지?”


형근 씨는 산행 출근길에 나서며 중얼거렸다. 회색빛 하늘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지만, 당장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손에 쥔 타다를 지면에 내리쳤다. 톡. 묵직하면서도 경쾌한 소리가 아스팔트를 타고 올라왔다.


“형근 씨, 오늘 지면이 유독 단단하게 느껴지네요. 조심하세요.”


타다가 말을 건넸다.


“그러게. 바람도 없고, 구름도 움직이지 않아. 이상한 날이야.”


척추관이 좁아진 이후로 형근 씨의 걸음은 변했다. 목적지를 향한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지면의 질감을 하나하나 읽어내는 신중한 타진으로. 타다의 묵직한 울림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걷다 보니, 특정 지점에 다다랐다. 제이 점포 앞쯤이었을까. 예고도 없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르르쾅쾅. 천둥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아, 이거 어쩌지?”


형근 씨는 재빨리 점포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다. 좁아진 척추 사이로 신경이 날카롭게 반응하며 통증이 타고 올라왔다. 그는 서둘러 타다의 잠금장치를 풀고 푸시 버튼을 아래로 밀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3초 만에 의자로 변신한 타다가 그의 무게를 묵묵히 받아냈다.


“50cm, 딱 좋은 높이지. 앉는 휴식과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 사이의 가장 적절한 타협점이야.”


형근 씨는 앉아서 숨을 고르며 핸드폰을 꺼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처마 밖으로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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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서옥 씨? 저 지금… 비 때문에 꼼짝 못 하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서옥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플하고 당당했다.


“기다려 보세요.”


“아, 네. 그러는 수밖에요.”


“괜찮아요. 제가 손 좀 써 볼게요.”


전화가 끊겼다. 형근 씨는 타다에 앉은 채로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물은 하늘에서 떨어지지만, 땅으로 스며들지. 모든 것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비도, 사람도, 통증도.”


“형근 씨, 참 많이 기다리시네요.”


타다가 말했다.


“뭐, 기다림도 하나의 기술이지. 안 그래?”


“기술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거 아닌가요?”


“체념? 아니야. 체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고, 기다림은 무언가가 올 것을 믿는 거야. 둘은 달라.”


“그럼 형근 씨는 지금 무엇을 믿고 계신 건가요?”


“서옥 씨가 뭔가를 해줄 거라는 걸.”


타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형근 씨는 처마 밑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멀리서 누군가가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옥 여사가 연락한 지인이었다.


“여기요! 이거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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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경가 ■시집 : 천년의 숲에 서 있었네 외 5권 ■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월간 조경헤리티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2019) ■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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