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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경 Jun 08. 2022

이어령, 떠난 그를 더 알고 싶어 지는 책들

벽돌이 아닌 계속해서 굴러가는 돌멩이가 되어보자

퇴근하고 버스 안 마스크를 낀 사람들 속에서 한 기사를 발견했다. 그 기사는 바로 서울대 졸업 축사 글이었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는 무거웠지만 쉽게 읽히는 글이었다. 그 동시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글. 이제 갓 졸업하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던지는,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이어령 선생님의 질문은 누구나 떠들어대는 시끄러운 말들을 한 줄로 탁! 하고 요약해준 느낌이었다. 그중 몇 줄만 발췌해온 것은 아래 글이다. (전문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길)


하지만 신기하게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는 마스크의 본질과 그 기능이 그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면을 모두 통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해서 쓰는 마스크”라는 공생관계는 지금까지 생명의 진화를 먹고 먹히는 포식 관계에서 남을 착취하는 기생 관계로 해석해 왔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출처] "마스크 왜 쓰는가" 수척해진 이어령, 서울대 졸업 축사의 울림|작성자 등대 마루



얇디얇은 마스크 한 장에서 생명 자본을 논하고 사회관계까지 사고를 확장할 수 있다니. 이어령?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쓴 글이 더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찾아본 결과 대단한 문학 거장이었단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왜 남의 생각을 궁금해하느냐고 하지만, 이 재미없는 일상 속에 호기심이라는 건 나에게 아주 소중한 즐거움이다. 그러데 이런... 이미 저자는 돌아가신 후였다. 서점엔 이어령 선생님의 생을 기리며 한 블록에 책들을 모아 전시해두었는데, 여든 살을 넘겨 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글쓰기를 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책 제목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여러 권을 들춰 읽어보니 <읽고 싶은 이어령>도 에세이집으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첫 번째로 본 책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마지막 수업. 이미 결말을 아는 영화를 들여다보듯이 책장을 넘겼다. 이미 누군가가 스포를 한 영화여도 줄거리를 어떻게 풀어냈을지가 궁금해 시간을 내어 보는 나다. 인터뷰를 글로 옮긴 책이라 이미 알고 지내왔던 스승님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하는 기분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읽을수록 아직 읽지 않은 책의 두께가 얇아지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다 읽고 나면 이 대화가 끝날 것 같아서.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는 아직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의 첫 장을 여는 것처럼 설레면서도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할까 봐, 상대방이 꺼내놓은 이야기를 못 쫓아갈까 봐 그게 걱정인 경우도 있는데, 인터뷰를 진행한 김지수 작가와 이어령 선생님의 대화는 인문학 지식이 적은 나도 따라갈 수 있는 대화여서 안심이 되었다. 간혹 툭 던지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도 가슴이 턱 막히는 문장들이 있었지만, 다시 곱씹어 볼수록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지적 대화가 넘치는 책이다.


단순히 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 외에도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꼭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 오지랖 좀 부려보려 한다. 사회생활 7년이 넘어가 어느덧 8년에 접어든다. 돈이 많아 아주 좋은 것들, 최고인 것들을 누린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부족하게 지내온 삶도 아니었다. 요새 들어 내 뒤에 엄청나게 많은 타이어들을 여러 개 끌고 억지로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엄청 힘들게 애쓰며 나아가고 있으니 주변의 것들을 볼 여유 따윈 없이 가슴속 무언가를 태우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공허한 나날이 많아졌다. 그 빈 곳을 돈으로 채워볼까 싶어 주식도 시작해 그 참에 돈도 벌어 보고, 겁도 없이 오피스텔 분양에도 손을 대 손해 볼 뻔했던 경험도 했다. 그렇게 돈 버는 재미라도 키우자 싶어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채우고 싶었던 이 공허함이 돈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이때부터 1시간 일찍 출근해 책을 읽는 독서 습관은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다. 경제 지식은 덤이요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 덕분에 퇴근길에 뉴스를 읽는 습관도 생겼다.


여든은 훌쩍 넘고 전쟁까지 겪어 살아남은 초대 문화부 장관까지 맡았던 그의 머릿속을 통해 나의 빈 구멍을 채우고 싶었다. 왜 모든 게 재미가 없어지고 공허한 나날이 지속되는지, 이런 것들은 어떻게 흘려보내야 하는지, 나보다 오래 살았던 당신은 알겠지. 답을 주세요. 하고 구걸하듯이 책장 한 장 한 장에 매달렸다. 그렇게 내 멋대로 그를 인생의 스승이라 여겼다. 그가 스승이라 생각하니 가슴을 후벼 파 눈물 젖게 하는 문장도 있었고, 마주한 적도 없는 그가 바로 앞에서 나를 꿰뚫는 것 같아 창피하게 느껴져 고개가 숙여지는 문장도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한 인간, 그 자체로 이 책 한 권에 스승이 전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있었다. 나의 텅 빈 공허함의 이유를 찾았던 한 단락을 소개해보겠다. 나는 이 단락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다. 출근길에도 퇴근 후에도 집 앞 카페에서도. 그만큼 내 마음에 꾹 꾹 새겨 놓고 싶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



현대인의 위기는 일할 때가 아니라 일을 멈출 때 생긴다. 자기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그 시간인 것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우리는 회사의 의자에서, 서류에서 놓여난다. 우리를 붙들고 있던 것들, 끝없이 명령하던 것들이 멈추게 되는 것이다. 기계는, 모든 도구들은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재빨리 사물 성을 회복한다. 그러기 때문에 방패나 칼은 싸울 때에만 무기일 뿐, 평화로울 때에는 조각과 마찬가지로 벽의 장식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일이 끝난다 해도 도구적 존재로부터 곧 인간성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터에서 벗어나면 술을 마시거나 유흥장을 기웃거리거나 어두운 골목길에서 서성대고 있다. 자신의 자아와 만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구처럼 일할 때에는 어느 한 구석에 숨어 있던 내가 오후 6시나 7시가 되면 흰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짐승처럼 숨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 타자에 의해서는 절대로 대체 불가능한 '나', 피를 나눈 형제로도 마음을 함께 하는 연인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그 영혼. 그것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구로서의 '나'를 그대로 연장시켜가려고 하는 것이다.


자아가 돌아오는 시간을 오락이나 마취로 그냥 죽여버리지 말라. 벽돌 문화* 익명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회복하는 길은 붓글씨를 쓰듯이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 우주의 유일자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작 하나를 패도 그 도끼 소리에 자신의 영혼을 담은 음악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벽돌은 분명한 목적이 있지만 산속의 돌멩이는 김장독 위에도, 망치로도 사용할 수 있는 자유성에 대해 이야기한 단락이 있었다)


<읽고 싶은 이어령> 중, 도구적 존재와 사물적 존재 -



출근했을 때는 일과 사람에 쫓겨 회사 시스템에서 나는 그저 '도구'이다. 그렇게 열심히 굴려지다가 퇴근하고 나서는 넷플릭스를 켠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책도 읽지만 계속해서 도구처럼 나를 굴린다. 그렇게 굴려지다 보니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망각한 채 살아왔다. 돈은 많이 벌면 좋지만 그 돈을 다 벌고 나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얼마까지 벌어야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걸까. 새로운 것을 남들보다 더 취하고 싶어 해외여행도 많이 가고, 명품도 사 보았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다 보니 유럽의 그 성당이 그 성당이고 맛집 수준은 어느 정도이고 빤히 예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즐거움이란 없다. 무엇을 해도 예상이 되고 빤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통해 얻은 경험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 목표를 보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목표로 가는 과정을 즐겼어야 하는데 말이다. 돈에 나를 묶어두면 안 된다. 나라는 사람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 건지, 어떻게 늙어가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찍어낸 벽돌처럼 목적이 하나뿐인 도구가 아닌, 스스로 욕망을 바꿔가며 끝없이 움직이는 돌멩이처럼 '나'를 채워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방법을 찾아가고 있고 그중 몇 개는 실천 해보려 한다. 하나는 내가 좋아하거나 배운 것들을 어딘가에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인데, 브런치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포함된다. 이렇게 책을 읽은 지 1년이 넘었는데 나 혼자 읽고 생각하니 뭔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기록해두고 그게 쌓이면 나의 또 다른 자산이 되겠지. 내가 채워지겠지 싶다. 두 번째는 진짜로 내가 아는 사람들과 새로운 것들을 많이 경험하고 싶다. 회사에서 동료와 함께 하는 새로운 프로젝트(피 튀기는 논쟁이 되더라도..ㅎㅎ)이거나 가족과 여행을 하거나, 친구와 새로운 취미를 함께 하거나, 지인들과 새로운 주제에 대해 토론하거나. 이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정한 규칙 중 하나는 모두와 이 경험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 모두가 아니어도 좋다. 한 명이어도 좋다. 이 새로운 경험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돈은 나에게 수단이 될 것이다. 뚜렷한 목표도 필요하지 않다. 어차피 '나'를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이루어나갈 거니까.


주체할 수 없는 자아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좋다. 좋아하는 것이 없어도 좋다. 나를 인정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오래간다. 나의 해방 일지에 나온 단어를 활용해보겠다.

조금은 어설프고 모자라고 상처 투성이인 나라도, 오늘부터  자신을 추앙해보는  어떨까?



골목이나 골방에 있는 사람은 남의 골방의 아픔을 모르거든. 그러나 추위로 확연하게 느껴지기 전까지는 오히려 '모른다'는 인정이 매우 중요하다네. 인간은 타자의 고통을 해결해보려고 분배의 문제로 풀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그 복잡성에 부딪히고 말았네. 사회주의가 그렇게 쉬운 선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그렇게 쉬운 악이 아니었던 거지.


그 진실을 알려면 또 골방에서 나와야 해. 필록테테스가 그때 뱀에 물려 무인도에만 있었다고 가정해보게. 전쟁에서 이기는 승리의 참의미를 알았겠나? 상징적인 자기 인생의 전쟁에서 말일세. 영원히 못 이기는 거야. 그런데 결국 광장으로, 트로이 전쟁터로 나갔잖아. 상처와 활이 하나가 됐을 때는, 아무도 끝내지 못했던 그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거야. 인생을 해결할 수 있는 거라네.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아.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



책장을 덮으니 스승이 나에게 묻는다.

"존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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