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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경 May 04. 2024

오늘부터 단축근무 하겠습니다

임산부 팀장으로 살기

올해 초 나의 인생에 큰 이벤트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결혼이고 나머지 하나는 임신이다. 윤석열 나이 아닌 36세로 출산을 준비하기에 좋은 나이는 아니다. 앞으로 10개월 뒤 출산을 가정하면 늦은 나이, 의학적 기준으로 노산이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신랑과 나는 아이를 낳는 것에 찬성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했던 시기보다 빨랐지만 갑작스러운 임신도 조금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임신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내 안에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회사는 어떡할 건데?

아이 낳으면 집도 커야 하는데 괜찮을까?

출산 후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임신에 대한 기쁨보단 두려움이 앞섰다. 신랑과 가족들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만, 실제로 내 마음은 그들과는 조금 동떨어져있었다.



산부인과에서 확인 후, 나는 이 사실을 가장 친한 주변인들과 회사 대표님께 말씀드렸다. 그들 역시 축하해 주었고 걱정 어린 말들도 건넸다. 이제 이직은 못하겠네, 라든가 회사 일은 잘 맞춰 가보자 등.. 나와 아이에 대해 물어보는 것에 앞서 나의 커리어에 대한 말들이 주가 되었다. 솔직한 말로 산모인 나도 처음에 든 생각이 나의 일에 대한 걱정이었는데, 저 사람들이라고 다를까? 그래, 당연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당연한 거야..


그리고 임신 6주 차에 접어들며 입덧을 시작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주말에 나가는데 뭔가 기운이 없고 목도 말라 평소에 사 먹지도 않는 물을 편의점에서 사 마셨다.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도 기운이 없고 울렁거렸는데, 다음 날 속이 너무 울렁거리고 밥도 잘 먹히지 않았다. 아, 이게 입덧이구나! 특히 아침 빈 속에 숙취 같은 증상은 출근길을 힘들게 했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통근 열차의 텁텁한 공기가 속을 더 울렁거리게 했다.


며칠 버텨보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아직 임신확인증을 못 받았던 터라 산부인과에 방문해 서류를 끊었다. 임신 확인증과 *단축근무 신청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관련 부서에는 사전에 미리 얘기를 해놨었지만 대표님께는 신청 당일날 말씀을 드렸었다. 신청일에 바로 통보하듯 말씀드린 건 예의가 아닌 거라 생각했지만, 근무 시간 내내 속이 울렁거리고 미치겠어서 누구 눈치를 볼 여유 따윈 나한테 없었다.

*임신 초/막달에 유산 방지를 위해 국가에서 법적으로 보장하는 2시간 단축근무 제도이다.



슬랙으로 말씀드리자 대표님이 회의실로 나를 따로 부르셨다.

솔직히 이건 아니지 않아요? 통보하듯 얘기하는 건 좀 아닌거 같은데. 단축근무도 슬랙 대화명으로 쓰지말고 개인적으로 알리세요.


당일 말씀드린 건 죄송하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회사에 7년이란 오랜 시간을 근무한 나에게 돌아오는 대우가 이런 것이라니? 더군다나 회사 중요직에 있는 사람이 임신을 했는데 단축근무에 대한 제도 조차 모르시는 대표님을 보며, 나는 참 허무하면서도 속상했다. 준비가 되지 않은 회사 정책과 대응들도 서운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임산부가 회사에 피해를 주는 듯한 사회적 풍토를 당연하게 생각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 당연한 생각이 이런 사회를 만든 거라고.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데..


그리고 나는 임산부 뱃지를 들고 출근한 지 2주가 되어가고 있다. 입덧도 2주차.. 정말 힘들어서 육아휴직 당장 쓰고싶지만 아직 출산까지 7개월이 남아 그때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 나 힘들다고 휴직을 막 쓰고싶지는 않아 참고있다. 그렇게 힘들게 출근하고 일까지 하고 남들보다 2시간 빠르게 퇴근하지만 지하철까지 가는 것도 힘들다. 그렇게 임산부석에 앉으려고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열렸는데 임산부석에 누군가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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