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이겨낸 사람 나야 나
“우리가 죽으면 네가 우리 대신 엄마 아빠 노릇을 해야 한다”던 엄마의 말을 알차게 귀담아 들어서였을까. 나는 11살 주제에 스스로를 희생해 막냇동생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진아! 언니 발로 차고 땅으로 헤엄쳐 가!”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막내가 바닷물 속에서도 야무지게 양발 킥을 날려왔다. 그 반동으로 내게서 멀어져 가는 동생을 바라보며 둘째에게 소리쳤다. “아빠 불러줘!”
튜브를 몸에 끼고 있다는 사실은 한 조각의 위안도 되지 못했다. 아무리 팔을 내저어도 점점 육지와는 멀어졌다. 발끝에 쥐가 나도록 발가락을 펴 봐도 닿는 것은 허공 같은 물살뿐. 해수욕장 저 멀리 우뚝 솟은 절벽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아빠가 맨발로 뛰어내려온 것과 동시에, 내 힘으로 뭍에 닿았다. 망망대해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바닷속에 바위가 있었던 것. 거기 닿은 발끝이 날카로움에 움찔댔지만 그 뒤로 채워진 깊은 안도감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날 이후 물은 두려움이었다. 블랙홀은 미지의 두려움이었지만 바다는 "인생 실전"의 그 실전이었다. 대학 동아리 선배들과 간 동해바다, 고작 허벅지 깊이의 바닷물에 던져진 나는 제발 살려달라며 뭍으로 기어 나왔다. 심해 다큐멘터리는 쳐다볼 수도 없었다. 이집트 다합, 필리핀 세부 같은 다이빙 스폿을 여행하면서도 한 번도 바다에 한눈팔지 않았다. 호핑이나 다이빙을 위해 배를 타는 사람들을 나른하고 지루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책장이나 넘겼다. 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수영이 ‘땡기지’ 않는다고 치장했지만 물속에서는 온몸이 굳고 삐걱댔다.
그러다 실내수영을 시작했다. 그 시간을 책으로 엮고 그 책에 물빛색 띠지를 두른 뒤 문구를 하나 쓴다면 이렇게 쓸 수 있으려나. "두려움 많던 인생, 새로운 챕터의 시작! 울고 웃으며 통과한 물살, 그 빛나는 날들!"
킥판을 떼는 데만 2년, 거쳐간 수영장만 4곳. 나를 포기한('포기하지 않은'이 아니라) 많은 선생님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물결처럼 출렁인다. 그날들을 겪으며 지금의 나는 자유형, 배영, 평영에 이어 접영까지 해내게 되었다. 이렇게 쓰면 참으로 간단해 보이는 일은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났고, 포기와 시작이 반복됐다. 어려워서 좌절했고 난데없는 설렘에 당황했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반면 놀랍도록 충만했다.
이쪽 레인 끝에서 저쪽 끝으로,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팔과 다리를 허둥지둥 젓는 일은 때론 우스꽝스럽다. 섬으로 갈 땐 배를 타면 되는데, 내가 물고기도 아닌데, 스킨스쿠버를 하려는 것도 철인삼종 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수영을 하려 하고, 하고 있나.
소설가 김연수는, 무려 1996년 처음 달린 이후로 지금까지도 달리고 있을 그는,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번역하며 이렇게 썼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들은 우리를 구원한다. 왜냐하면 어떤 보상도 없다면,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게 달리기란 그런 것이었다. 매일 한 시간씩 내가 왜 달려야만 하는가 생각한다. 물론 아직 나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에게 달리기가 그랬듯 수영이 나를 구원했다. 물속에 귀까지 푹 담글 때 실감하는 단절감 혹은 고립감. 모든 세상의 소리는 벌의 날개소리처럼 웅웅대며 뭉개지고 우주의 심연에 떨어진 것처럼 먹먹해지는 상태. 공황의 느낌과 비슷해 처음엔 놀랐지만 그 감각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심장이 펴지는 기분이었다.
혹은 세계의 확장. 감히 그렇게 불러도 좋을까. 굳이 의미를 붙인다면 말이다. 19년 동안 살던 작은 도시를 떠나 홀로 상경했을 때처럼, 배낭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었을 때처럼, 땅을 박차고 물살을 가로지르는 일은 공간 이동 이상의 무엇이었다. 삶에서 가라앉을 일밖에 없던 내가 떠오르는 감각을 알아버린 것은. 늘 밝은 눈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흐린 눈을 하고 바닥의 타일 따위를 세어보는 일은. 무용하고 무용하지만 무용해서 좋은 나의 헤엄은 그런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