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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Jul 27. 2021

여름에 떠올려보는 겨울 한라산

또 알람을 맞췄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아침 8시경에 게스트들이 함께 아침을 먹는다. 보통 제주 게하들이 토스트 두 쪽과 잼을 기본으로 계란, 치즈 한 장 등을 옵션으로 하는 아침을 내놓는데, 이 게하는 주인장의 특별한 요리가 차려진다. 우리 역시 이 조식을 기대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방음에 취약하다고 해서 더 조심하느라 이렇게 조용한 건가...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우리 알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깰까 걱정되어서 그랬나, 더 잠을 설쳤다. 욕실이 비었는지 눈치껏 살피면서 고양이세수를 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K는 욕실을 기웃거리며 4번이나 양말을 벗었다 신었다 했다. "식사하세요!" 7시 40분쯤 되었을까, 알고 보니 안주인의 목소리가 알람이었다.


어제 담소를 나눴던 카페로 나가보니 이런 밥상이 차려져 있다. 치킨팟파이, 처음 먹는 음식이다. 혀를 델 정도로 뜨끈하고 속은 꽉 차 있다. 파이를 조금씩 슾(슾은 스프 아닌 슾이라고 적어야 슾 맛이 나는 듯!)에 적셔 먹는 맛이 일품이다. 겨울의 식탁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과일샐러드 하며 직접 짠 감귤주스까지.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는 것만이 요리에 대한 예의라 생각해 천천히 아침식사를 마쳤다. 어제 맛보고 싸달라고 부탁드린 쿠키도 샀다.


주인장께 오늘 한라산 간다, 어떻게 가느냐기에 제주터미널까지 가서 버스타고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한라산 간다는 다른 게스트가 또 있었나보다. 함께 타고 가면 어떻겠냐고 해주셔서 감사히 제안을 받았다. 그리하여 연령대를 알 수 없지만 심성 좋아 보이는 두 여성 분께 인사를 하고 답례로 쿠키를 드렸다. 모든 게스트의 작별의식인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나니 감귤, 찐고구마, 몽쉘을 담은 봉지를 한라산에서 먹으라며 들려주신다. 영업적인 친절, 게스트를 의식한 과한 친절, 무뚝뚝함이 난무하는 게하 주인들 사이에서 주인장의 마음 씀씀이가 빛났다.



운전하시는 분이 "제가 누굴 태울 실력이 못 되서..."라고 운을 뗀 건 단지 예의만은 아니었다ㅋ 기어를 잘못 놓고 있었고, 연료경고등이 켜진 걸 모르고 한라산까지 갈 뻔 했고, 3차선에서 1차선으로 속도를 줄여 가로지르기, 이런 곡절 끝에 영실대피소로 올라가는 길목에 당도했다. 1시간 50여분이 걸렸다.


차가 들어갈 수 없다기에 남들 다 그러하듯 큰 길 가에 차를 세워두고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K가 740번 버스 기사님과 눈빛을 교환한 덕에 멈춰 섰고 우리를 시작으로 근처 걷기 시작한 사람들 모두 우르르 올라탔다. 길 곳곳에 주차한 차들 때문에 버스는 더디게 꼬부랑길을 헤쳐 나갔다. 간신히 영실매표소에 내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했다. 2.5km 떨어진 영실통제소를 12시에는 통과해야 입산이 가능한데 이미 시간은 11시 30분이었다. 뛰어도 힘들 거리지만 여기까지 온 게 아까우니 우선 가보기로 했다. 날씨가 문제였다. 너무 더웠다. 히트텍을 입고 두꺼운 등산셔츠를 입고 오리털내피를 입고 오리털파카를 입은 나는 얼마 걷지 못해 오리털파카를 벗었다. 그런데 별로 따듯하지도 않으면서 부피는 큰 이 요물이 허리에 묶어도,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교차시켜 묶어도, 영 불편했다.


K는 계속 자기 가방에 옷을 넣으라고 했고, 이미 신발끈을 새로 묶느라 시간을 허비한 나는 시간을 더는 지체하기가 싫어 괜찮다고 하다가 실랑이 끝에 K의 가방에 옷을 넣었다. 하지만 이미 K는 단단히 심사가 틀어진 뒤. 계속 말을 붙이고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으나 한번 심퉁이 나면 저 혼자 풀릴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그를 위해 나도 입 다물고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통제소에서 통제하지 않았고 12시를 10분인가 넘겨 통과한 우리는 본격적인 설원으로 들어섰다.



지난해 3월 어리목으로 올라 영실로 내려와 봤으니 익숙하겠거니 했는데 지천이 눈이니 분간이 잘 안 됐다. 아이젠, 스패츠, 새로 산 중등산화로 무릎 밑이 묵직한 것도 어색했다. 하지만 눈길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 계단을 오르는 일보다는 덜 고된지 상고대, 흰 눈썹을 한 병풍바위, 운해에 감탄하며 별 무리없이 고도를 높여 나아갔다. K가 "겨울산 재미없다"는 말로 내 속을 뒤집어 놓든 말든 젖무덤처럼 발 아래 펼쳐진 오름들이 내 가슴을 탁탁 쳤고, 찌르르했고, 눈물이 고였다. 오랜만에 보는 자연의 숭고, 그 후로 본 백록담이라던가 윗세오름 부근의 탁 트인 눈밭 모두 이 오름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반대방향에서 내려오는 한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라면 줄이 1시간이라 못 먹었어." 하고 투덜대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애써 못 들은 척 윗세오름대피소까지 꾸역꾸역 걸었다. 100m 밖에서도 저것이 라면줄이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는 챙겨간 라면 1개에 감사해하며 게하 주인장이 싸준 고구마와 라면, 몽쉘 등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리고 마신 두 잔의 맥심커피. 크핫.




올라올 때 내리막이 별로 없었던 것이 내려갈 때는 좋은 일이 된다.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 180도를 모두 가슴에 품는다. 내려오는 길 기분이 풀린 K가 물었다. "우린 왜 산에 오르는 걸까?" 나는 그 물음에 필요도 없는 대답들을 갖다 붙였다. 얼마나 쓸모없는 대답이었으면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K의 그 질문은 지금까지 남아 나를 괴롭힌다. 저 질문이 "우리는 왜 사는 걸까?"로 들렸기 때문이다. 왜 사는 걸까, 죽을 걸 알면서도. 왜 산에 오르는 걸까? 바로 내려와야 할 걸 알면서도. 그 질문에 답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던 것도 같다.


한라산 등반 뒤풀이 겸 여행 마지막날임을 위로하며 우리는 도수 높은 한라산을 2병이나 마셨다. 투명한 병에 든 한라산을 두고 근고기집 주인 아줌마는 "육지에는 없지 않아요?"라고 했고 주인 아저씨는 "이럴 때 센 거 마시지 언제 센 거 마십니까."라고 했다. 그 덕에 얼큰해진 우리는 마지막 날 따위의 감상을 가질 여유 없이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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