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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Aug 12. 2021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집중치료실. '집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때문에 선뜻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TV에서 보았던 집중치료실은 어딘가 잘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 버티고 있고 뭔가 거창한 장비가 환자들의 몸에 달려 있었는데 작은 요양병원의 집중치료실은 문도 의료기기도 없이 탁 트인 공간에 환자들의 침대, 골골대는 소리만 가득했다."여기 계시던 환자 어디로 갔지요?" 엄마가 병실 안쪽 침실로 가서 간호사에게 묻는 것과 동시에 나는 병실 입구 왼쪽 침대에서 그녀를 '발견'하곤 엄마를 불렀다. "엄마, 할머니 여기 있네."

그녀는 꼬장꼬장했다. 엄마가 들려준 시집살이의 일화, 이를테면 둘째 동생을 낳은 2월 엄동설한에 동네 냇가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다던가, 여행 간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다 꾸벅꾸벅 조는데 때마침 돌아온 그녀가 "집에서 키우던 개도 집 나가면 신경쓰는 게 사람인데 시애미가 나갔다 안 들어왔는데 잠이 오냐" 했다던가. 양친을 일찍 잃은 엄마는 시집 와서 서러운 일을 겪을 때마다 고해 바칠 친정도, 살가운 남편도 없었다. 온몸으로 경상도 사나이임을 알리는 무뚝뚝한 남편과 며느리를 며느리로 여기는 시어머니만 있었다. 평생을 그녀 근처에서 살아온 엄마는 나이가 좀 들어서야 속상한 일을 두고 그녀 면전에서 따져보기라도 했지 평생을 그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뒤돌아 속을 끓이거나 뒷말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랬던 엄마가 누구보다 섧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여기 누구 왔는지 보이소. 이 사람 누굽니꺼?" 1년 만에 너무도 변해버린 그녀를 보고 할말을 잃은 우리 대신 부지런히 그녀의 손을 잡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물티슈로 얼굴과 입을 닦고 잇몸 상태 좀 보게 입을 좀 벌려보라고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마침 저녁시간,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사이로 엄마의 목소리만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다.

엄마를 힘들게 했던 그녀는 죽음을 앞둔 것처럼 보였다. 늙었다거나 아파 보인다기보다는 지쳐 보였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지난해 가을 즈음이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지팡이를 짚은 채였지만 걷는 데 무리가 없었고 말도 잘 알아듣고 그냥 늘 지내오던 모습 그대로였다. 침대위의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한 올도 흐트러짐없이 빗어올렸던 검은 머리는 군인들처럼 짧게 깎였고 염색을 하지 못해 백발이었다. 마른 몸, 벌어진 환자복 사이로 도드라진 가슴뼈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왼쪽 콧구멍에서 나온 가느다란 관이 왼뺨을 가로질러 머리 위에서 갈 길을 잃었고 관을 자꾸만 빼서 묶어두었다는 두 손은 안으로 곱아 굳은 채였다. 온몸이 야위었지만 무릎 아래로는 퉁퉁 부어 기이했고 기름기없는 피부에는 허옇게 무언가 일어났다. 몸을 마음대로 못 움직여 욕창이 생겼다는데 왼쪽 허리 밑에 받쳐놓은 침구 같은 것이 그래서인가 싶었다. 그녀의 눈은 허공을 헤매거나 우리를 골고루 쳐다보았는데 시종 입술만큼은 안쪽으로 말려 앙다문채였다.


엄마가 무슨 질문을 하든 그녀는 "앙~앙~" 한결같이 새된 소리를 냈다. 우릴 가리켜 "내 가지들(강아지들)"이라고 한 것, 순서는 틀렸지만 나와 동생들 이름을 차례로 부른 것이 유일한 소통이었다. 눈물을 그치지 못하던 우리 자매들이 그 병원에서 가장 이질적이었다. 면회 중간에 화장실엘 갔다가 고장난 문걸쇠에 매달린 나일론 끈을 보자 그 초라하고 위태한 것이 인생인가 싶어져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엄마가 "이제 가자, 할머니한테 인사하자"라고 했을 때 약속이나 한 듯 흐느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일 결혼해 서울에서 살게 된 막내와 곧 몸을 풀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이 병실을 찾을 일이 다신 없을 것 같다는 확실한 예감 때문이었다. 지금 보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실감 나지 않아 자꾸만 앞이 흐러졌다.

놀라운 일은 병원을 나와 차를 타고 다시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어났다. 울음 끝 벌개진 얼굴로 다시 찧고 까불며 웃고 낄낄대다 누군가 말했다. "대성통곡할 때는 언제고 이젠 또 웃네." 비난도 놀라움도 아닌 그냥 그렇다는 뉘앙스였다. 숙연해진 것도 잠시, 내일 결혼하는 막둥이에게 불행이나 죽음의 어두운 기운은 가당치 않다는 듯 우리들의 투닥거림, 밝은 계획들, 다짐들, 위안들이 부풀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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