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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Aug 28. 2021

절반은 미니멀리스트


나는 잘 못 버리는 사람이다(시작부터 고해성사).


심각한 것들로는 십수년 전 영화관 멤버십 카드부터 아주 오래된 영화 팸플릿들, 여행지에서 가져온 모래, 돌 같은 것이 있었다. 사놓고 단 한 번도 신지 않은 롱부츠, 흔한 레퍼토리지만 갑자기 살이 쪄서 입지 못한 스키니진은 애교일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받은 각종 편지들, 쪽지들(그중엔 포스트잍에 적힌 것도 있다)이 100리터 쓰레기봉투로 2봉이나 되었다(맥시멀리스트들이여! 이 문장이 과거형인 것에, 쓰봉이 언급된 것에 주목합시다).


버리지 못하는 성격인 것이 가계에 도움이 될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결혼할 때 둘 다 자취를 하고 있던 우리는 새로 혼수를 장만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일단 자취살림을 합쳤다(실용성과 무던함의 끝판왕들이여). 나는 7~8년 쓰던 300리터짜리 냉장고와 20대를 함께한 책장과 서랍장을 들고 왔고, K는 헹거와 피아노를 가져왔다. 결국 우리가 결혼하면서 장만한 살림은 세탁기, 식탁 밖에 없었다. 그랬는데도 짐은 새끼치듯 늘어나 작은 평수의 아파트가 발디딜 틈 없게 되었다. 큰 짐은 없었지만 몇 년 동안 열어보지 않은,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박스들이 수두룩했다. 잡동사니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K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나보다   위다. 많이 사야 싸다며 1  이상의 생활용품을 쟁여놓는 사람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이유로(정말일까?) 폴로셔츠, 체크무늬 남방을 깔별로 갖고 있고 청바지는 30개가 넘는다(결혼생활   동안 청바지 입은 모습은 10번도  봤는데). 아주 오래된 게임CD 게임기, 그것이 담겼던 포장박스까지  접어 모아두고 있다.


우리에게 문제는  있다. 당연하게도 물건이 어디 있는   모른다는 . 그걸 찾는  시간을 쓰면서  시간을 아깝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육아휴직을 하고 집구석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나는 운명처럼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읽게 된다. 모든 책은 궁합이 맞는 시기가 있다. 그때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줄여야 했던 나는, 잡동사니 속에서 필요한  재빠르게 찾지 못해 곤란했던 나는, 그제서야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을 직시하게  것이다. 아니, 내가 힘들게 벌어 마련한 공간의 절반 이상이 짐을 보관하는  쓰이고 있다니! 나중에 쓰면 되지 했던 것들을 정작 쓰지 않는다면 그걸 대체 짊어지고 이사를 다니는지! 혹시 저렇게 많은 책을 이고지고 있는 것이 책장을 통해 나의 가치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은 아닌가!


드디어 비우기를 시작했다. 너무 소중해! 절대 저것만은! 했던 오래된 영화 팸플릿을 다 버렸다. 제목만 들어도 아련해지는 <봄날은 간다>,  <번지점프를 하다>부터 <공동경비구역 JSA>,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헤드윅>, 비교적 최근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까지 모두 안녕.


난 이승환 좋아했는데 오빠들이 여기 왜....
버릴까 했지만 남겨둔 추억 한 조각


안 입는 옷들도 대부분 비웠다. 거기에는 결혼식 피로연 때 입은 순백색 미니 원피스도 있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곤도 마리에식 기준을 따르지 않은 것이 유효했다. 모든 옷에 다 설렜기 때문이다. 저걸 입었던 나를 상상하면 웃음이 비실비실, 저걸 입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기쁨이 넘실넘실댔다. 오히려 더이상 살이 빠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버릴 수 있었다. 출산 후 변해버린 몸을 마주하다니, 리스펙.


'추억'과 관련된 물건들, 이를테면 일기나 내면의 무언가를 표현한 것들은 스캔하고 버렸다. 하지만 편지 묶음들, 오래된 영화티켓들은 '그냥' 버렸다. 편지의 송수신인 이름을 지우는 일도 하지 않았다. 일단 편지가 너무 많았고, 내가 누구든 그가 누구든 읽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감정과 기억은 쓰레기통이 어울렸다. 물론 그 편지들엔 십 수년 전의 남자친구가 보낸 것도 있었다(결혼할 때 주변정리를 잘 하지 않으면 옛 연인의 편지가 든 쓰레기봉투를 남편의 손에 쥐어주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고작 그 책 한 권 읽어놓고 K가 물건을 못 찾을 때마다 "그래서 버려야 하는 거야, 어디 뒀는지 기억도 못하는 건 정말 필요한 게 아냐"라고 으스댔다. 그렇게 물건을 어느 정도 비워낼 때쯤엔  <심플하게 산다>를 읽었다. 이제 물건을 넘어 정신, 건강에까지 미니멀리즘이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 테면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지 말고 그 원칙을 따르며 사는 삶을 보여주자" 같은 것. 오, 무궁무진한 미니멀리즘이여! 신봉합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에겐 봉인된 방이 있다. 현관 바로 옆, 애매한 짐들을 모두 던져놓고 열면 부정 탈 것처럼 행동하는, 이사한 지 1년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한 방. 그리고 3x5칸 책장 4개. 그러고도 거실 창문을 따라 죽 늘어선 책들. yes24나 알라딘이 적립금을 줄 때마다 늘어나는 책, 책들. 쟁여놓는 K의 습관도 여전하다. 휴지가 떨어져 급하게 편의점에서 한 개쯤 사는 날은 이번 생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30개쯤 되는 머그컵도 여전히 부엌 찬장을 짓누르고 있다. 결정적으로 가구를 이루는 두 명의 성인 중 한 명만 이 흐름을 탔다.


여행에서 가져온 팸플릿, 책자도 버렸다. 이쯤 되면 팸플릿 중독자였나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람과 '필요하면 그때 구하거나 사면 된다'는 사람. 나는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했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 이럴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오래된 히딩크의 멘트를 쓰다니 아직 갈길이 멀다). 공간에 여백을 더 많이 만들고 물건에 제자리를 찾아주어 정리 스트레스를 줄이고, 그 에너지를 다른 데 쓰고 싶다(이를테면 브런치?). 값이 싸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꼭 드는 것으로 골라 오래오래 쓰고 싶다. 그러다 보면 무취향이 콤플렉스였던 내게 취향도 생기겠지. 그리고 어쩌면 전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상과 몸, 마음을 내가 컨트롤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도 같다. "심플한 삶은 모든 것을 즐길 줄 아는 것, 가장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책 속 글귀처럼.


그런데 문장에도 비움이 필요하다. 이리 길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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