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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Aug 27. 2021

응답하라, 1994년 중1 김활보

책임감 쩌는 이 땅의 장녀, 그래 너 말야

활보야, 김활보! 그래, 거기 너!

주목받기 싫어하는 너를 이렇게 사람 많은 길가에서 크게 불러서 미안. 놀랐니? 나 이상한 사람 아냐.

그래, 경계하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으레 그렇듯 호기심이 네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구나.

1994년에 이런 타임슬립류의 영화나 드라마가 있었나 모르겠다. 그럼 이해가 쉬울 텐데.

난 미래에서 온 너야. 어라, 좀 실망한 얼굴이다? 기대했던 거랑 다르긴 하지? 우리 저기 가서 좀 앉자.

오늘 더우니까 아이스라떼 마셔야겠다. 넌? 그래, 아직 이런 데 와본 적 없지? 내가 골라줄게. 여기 주스 맛있겠네 키위주스 어때?


얘, 너 언제까지 날 그렇게 볼 거니? 우린 하나인데 그러면 나 속상해~ 이 몸 만든 거에 너도 일조했거든! 너 지금은 적당히 보기 좋지만 몇 년 안에 엄청나게 살이 찔 거야. 저주라니, 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대학입시 준비, 술마시기 좋은 밤 같은 명분이 생긴다구. 그나마 내가 관리해서 이 정도인 거야, 너 알랑가 모르겠다 저탄고지라고. 휘유, 말도 마. 그런데 활보야, 지나고 보니까 사이즈가 66인지 55인지, 체중계 숫자 앞자리가 뭔지는 중요치 않더라. 자도 자도 피곤한 몸뚱아리, 튀긴 음식을 먹으면 청구서처럼 바로 날아드는 소화불량, 그러니까 건강이라는 게 있어. 아유, 내가 열네살 한테 건강 챙기라니, 주책이다.


그 노래 기억나? "아침먹고 땡, 점심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오네요, 지렁이 세 마리 기어가네요." 해골 그리는 노래. 그 지렁이 세 마리가 지금 내 이마에 있어. 놀라지 말고 이거 봐. 30대에 완전히 자리 잡았어. 그러니까 하나만 약속해주라. 눈 뜰 때 눈꺼풀에 힘 딱 주고 뜨겠다고! 이마 끌어올리면서 눈 뜨다 보면 이렇게  돼. 나 요즘 딸한테 "엄마, 나 엄마처럼 이마에 주름 생기는 거 싫어!" 소리까지 듣고 있어. 세월이 가며 생기는 주름은 나이테 같은 거니까 오케이인데, 이런 주름은 좀, 부탁한다 얘!


너 요즘 전지혜 때문에 괴롭지? 니네 반에 새로 전학온 애. 알지, 다 알지. 너 일기장 '리트' 내가 아직 갖고 있거든. 그런데 활보야, 너 등수 밀려나도 괜찮아. 니가 몇 등을 하든 넌 너야. 그걸로 사람들이 실망하거나 등돌리거나 하지 않아. 그런 친구들이라면 차라리 그러라 그래. 엄마 아빠 실망? 야, 그것도 집어쳐라 얘. 엄마 아빠는 니 엄마 아빠 하는 게 직업인 분들이라 그냥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계신 거야. 지금 니가 그렇듯이. 너무 연민하지 마. 너 학기초에 목소리까지 안나올 정도로 아팠던 거 기억나니? 환절기 감기라 생각했던. 그거 빨리 잘 적응하려고, 애써서 그랬던 거야.


네가 8살 때 처음 가졌던 장래희망, 생각나? 소설가 되고 싶다며. 등수나 성적에 목매지 말고 재밌는 책 맘껏 읽고 재미난 영화도 계속 보고 그냥 너 좋아하는 거 계속 하면 좋겠다. 좋아하는 마음을 외면하는 것보다 불행한 일은 없더라 얘.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음... 의무감으로 하지 않는 거, 생각만 해도 궁뎅이가 들썩거리는 거, 배고픈 줄도 모르고 피곤해도 괜찮고, 마음이 달뜨니까 얼굴까지 벌개져서 너도 모르게 두 손으로 니 볼을 감싸게 되는 거. 그런 거 말야. 에이,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이라도 해서 알아낼 기세네. 그러지 말고, 어깨에 힘 빼고, 릴렉스.


니네 아빠 성질? 좋은 질문이다! 너도 이제 내가 누군지 믿나보네. 뭐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성질이 죽긴 죽더라. 모든 게 더디지만 날이 갈수록 괜찮아져. 동생들도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가 자기 없으면 니가 엄마 대신이라고 했지? 엄마는 계속 곁에 있을 거니까, 니가 걔네들한테 엄마 대신이 될 일 없으니까, 걍 니 꼴리는 대로 살아. 그래도 돼.


어때 나랑 이야기 나눠보니까? 잔소리 쩔지? 뭐 어쩌겠어, 니가 이런데. 그냥 너답게 살아. 암시랑토 안 해. 인생 확 망하거나 조지거나 그런 것도 너처럼 사는 애한텐 로또 맞을 확률로 드물거든. 로또? 아 로또라는 게 있어. 주택복권 그런 거. 아유 내가 로또 번호라도 외워올걸. 급하게 오느라 그만. 진짜 미안하다야.


암튼 이것만 기억해!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어 있거든. 너 생각 많기로 유명하잖아. 그것도 장점일 수 있겠더라. 다른 사람이 널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말고, 그 방향을 너한테로 돌려봐. 네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스스로를 어떻게 대접할지 말야. 그렇게 씐나게 잘 지내다가 우린 2021년 쯤에 다시 만나자. 2021년? 야, 당연히 오지! 지구멸망 이딴거 없어. 생각보다 금방이다 너. 그때 되면 내 말도 다 이해하게 될거야. 그러지 말고 오늘 오락실이라도 들러. 아님 코노라도. 아, 코노는 아직 없겠구나. 암튼 일탈 좀 해라 제발. 넌 그래봤자인거 내가 아니까. 근데 너 일탈이라는 말이 뭔지는 아니? 어휴.

야, 그리고 이거 개꿈 아니다!


#언젠가의 나에게 전하는 말 #딱: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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