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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Aug 23. 2021

커피와 초록과 이야기 사이 어디쯤

오늘의 주제: 내가 좋아하는 것

이렇게 명쾌한 주제를 앞에 두고도 키보드 위에 얹힌 손은 마네킹처럼 굳어 있다. 애꿎은 백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엔터를 쳤다가, 한글파일을 닫고 메모장에 제목을 써보고 브런치에 매거진부터 만들어보다가, 마켓컬리 광고를 클릭해 장을 보다가! 아, 소확행 리스트를 적어 간직했던 20대의 나로부터 대체 얼마나 멀어진 걸까.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다 15년 전 메모까지 뒤지며 낄낄대는 나를 보다 못해 K언니가 보내준 글귀를 다시 읽어본다.


"우리가 마음을 활짝 열고 심리학과 만난다면, 누구나 나만의 힐링 패키지를 만들 수 있다. 이 힐링 패키지에는 병원에 가지 않고도 상담사와 만나지 않고도, 내가 나를 치유할 수 있는 모든 마음의 처방전들이 들어 있을 거이다. 마치 지진이나 전쟁에 대비해 미리 꾸려놓은 생존 배낭처럼, 내 안의 힐링 패키지에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음악, 사람들과의 대화, 심리학에서 얻은 지식들, 문학작품의 문장들, 내가 맡은 모든 꽃향기, 맛있는 음식들의 향취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다." - 정여울,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中


아, 어렵다. 힐링 패키지를 만들려면 심리학과 만나야 한다는데. 나를 치유하고 처방전을 찾기 전에 1시간 내로 이 글을 써야 하니 '힐링 패키지'라는 말만 쏙 빼온다. 그 전에 우선 커피부터 한잔. 의식이나 의지 없이 나를 이끌리게 하는 것들이 무엇이더라.


가만, 이 커피 향이 끝내주네. 그래 임신하고도 하루 한잔은 괜찮다는 말을 복음 삼아 한잔씩 마셨을 정도로  난 커피를 좋아하지. 또 뭐가 있지. 초록과 책과 드라마. 바꿔 말하면 먹는 것과 자연과 이야기와 인생인가. 아니아니 너무 거창해. 이것이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른 글쓰기인가. 그럼 커피에서 시작하자.


유 스틸 마이 넘버 원


커피면 다 좋다. 집에서 드립하는 뜨거운 커피도, 밖에서 사마시는 진한 아이스라떼나 좀처럼 드물게 맛있는 아인슈패너도 괜찮다. 세 모금이면 빠르게 당을 충전할 수 있는 카누 더블샷라떼도 좋다. 다 좋지만 굳이 원두를 갈아 드립을 하는 건 향 때문이다. 인공의 향이 싫어 향초도 삼겹살 냄새 없앨 때나 쓰고 린스도 하지 않고 향이 강한 클렌저도 향수도 쓰지 않는 나에게 아이의 살냄새 다음으로 좋은 것이 커피 향인가 싶다. 좋은 것 리스트 상위권에 있는 커피가 일주일 혹은 한달 혹은 일년의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마시는 것이어서 괜히 다행스럽군. 고마워, 커피콩을 맨처음 발견했다는 목동 칼디!


초록은 내게 자연, 그 안에서 쓰는 몸, 신비한 에너지에 다름 아니다.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숲길을 걷는 것을 사랑한다. 사방이 신축 아파트로 둘러싸인 신도시에서 나는 기어코 초록의 점들로 연결할 수 있는 산책길을 찾았다. 작은 동산 너머 다시 아스팔트나 아파트 뒷편이 나오지만 다시 기어이 초록의 숲으로 이어지는, 누가 설계했는지 조금은 고마워지는 간헐적 숲길이다.


오래전의 히말라야 트레킹


주변의 것들이 쉽게 시시해지는 청춘이어서였을까, 그땐 눈길만 스쳐도 숭고해지는 광활한 자연 씩이나 되어야 우와, 했다. 그런 풍경을 보려고 비행기를 타거나 걷거나 했다. 도봉산도 북한산도 금방 끝나버리는 것 같고 어쩐지 목이 말라 대피소에서 잠을 자는 종주 쯤 되어야 와 산이구나, 좋아했다. 마지막 땀방울까지 다 짜낸 것 같은 소진된 느낌, 뇌는 없고 피가 도는 몸만 남는 느낌이 좋았다. 지리산, 설악산, 속리산, 엘곤산, 히말라야 자락들. 소진하고 돌아와 무언가를 채우면 그것이 왠지 전에 채웠던 것과 다른 것 같기도 해 또 좋았다.


지금 이 글조차 마감에 쫓겨 쓰고 있으니 글을 쓰는 것은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이 아닐지도. 하지만 읽는 것은 즐기며, 이야기라면 그 형태가 종이건 구전이건 영상이건 좋아한다. 늘 누군가의 서재나 책꽂이를 부러워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내 방을 갖게 되면서 채우기 시작한 나의 책장, 여러 시절을 보낸 숲속의 도서관, 이야기가 넓혀준 마음 속 상상의 방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일상의 작은 버팀목, 비밀스러운 호위무사였다. 꼬맹이적 <알프스소녀 하이디>에서 지금 넷플릭스에서 보고 있는 <너의 모든 것>까지. 지끔까지 만난 이야기 속 인물들을 따라 울고 환희하고 좌절하고 기뻐하면서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고 그 순간을 통과하며 조금씩 자랐던 것 같다.


이야기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소설책은 이 뒤에 꽂혀 있네;;


이렇게 하나의 글에서 좋다는 말을 여러 번 쓰다니 주제에 충실한 글이군 하고 자평하며, 그러니까 나만의 힐링 패키지는 BTS 음악을 들으며 간헐적 숲길을 산책하고 돌아와 아이스 라떼 한잔 마시고 드러누워 책이나 드라마, 뭐든 이야기에 풍덩 빠지는 것!


#day1 #딱:삔 #야.나.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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