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가까이서 죽음을 대면해본 적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새벽에 걸려온 부고 전화, 내가 아니라 아빠에게였고 그건 다음 번은 내 차례라는 뜻이었다. 그녀를 보내고 가장 많이 한 후회는 소식이 전해진 그날 아침 슬퍼하고 있을 아빠에게 전화 한 통 못했다는 것과 가버린 그녀가 정신이 멀쩡할 때 내게 걸어온 전화에 답신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녀가 죽던 날 엄마는 중국여행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여행엘 가지 않았던 아빠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길로 술을 꺼내 마셨다(고 한다). 아빠는 거의 평생을,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서도 그녀와 한 마을에서 지냈다. 아빠의 일터가 그녀 집 부근이었기에 매일 그녀를 챙기며 투닥거리며 살았다. 그날따라 가게를 겸한 집엔 아무도 없었을 테고 어두컴컴한 복도로 나와 유일하게 불 밝혀진 술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들었을 아빠의 마음을 더듬더듬 가늠해본다. 아빠가 장례식장에 도착한 것은 소식이 전해진 지 몇 시간이 지난 오전이었는데 어떻게 찾아왔을까 싶을 정도로 좀 취해 있었다는 말도 들렸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소식을 듣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뒤 먹지 않으면 곧 상할 재료들로 반찬을 만들어 저녁을 먹고 내일 기차에서 만날 막둥이 먹일 과일을 깎고 밤을 삶았다. 여행길에 나서는 사람처럼 분주했다. 이튿날 부산역에 내려 그녀의 영정 앞에 설 때까지도 우리는 막 신행을 마치고 돌아온 막둥이 부부의 여행 에피소드나 신혼살림, 그 밖의 소소한 추억으로 웃었다.
신발을 벗고 있는데 엄마가 나와 글썽이는 눈으로 두 팔을 벌렸다. 분향소로 가니 아빠가 붉어진 얼굴로 우릴 맞았다. 와중에 그녀의 영정사진이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은 곡을 했다. 나 세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들은 삼 십 년 넘도록 곡하는 법을 잊었겠구나 싶었다. K가 대표로 향을 피우고 함께 절을 하고, 나는 아빠를 부드럽게 안았다. 아빠를 안는 일조차 어색한데, 작아진 아빠의 몸뚱이가 내 품에 쏙 들어오는 것은 더 그랬다. 말없이 작아진 등을 쓰다듬었다. 아빠의 등을 쓰다듬다니, 이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두의 눈물은 거짓말같이 멎고 엄마는 고인의 며느리가 아니라 우리의 어미가 되어 수육이며 떡이며 과일을 내왔다. 배가 고프지도, 무언가를 먹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한쪽에서 들리는 곡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모두 무언가를 씹어 삼켰다. 순간 아주 어릴 적 작은할아버지 장례식이 있었던 고향 마을 그 댁 마당 풍경이 소환됐다. 늦은 밤까지 불밝혀진 시골집은 눈물과 곡이 없었다면 축제 마당이라고 기억될 것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실신할 듯 울며 곡을 하다가도 뒤돌아 아이들에게 웃어주던, 갓 미망인이 된 작은할머니에게 경악하던 꼬맹이가 나였다. 어른들은 어쩜 저렇게 가식적일까 충격을 받았던 꼬맹이는 어느새 아무렇지 않게 장례식장에서 눈물 뒤에 웃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낮 시간의 장례식장은 동네 사람만이 간간이 들르는 변두리 마을의 작은 슈퍼마켓 같았다. 간혹 안면 있는 친척 몇몇이 와서 자리를 지켰다. 한 친척이 내 손을 꼭 잡더니 “할머니가 너를 참 이뻐하셨지”라고 했다. 그제야 그랬구나 싶어졌다. 타지로 나오고 결혼을 하면서 잊고 지낸 사실이었다. 저녁이 되자 빈소는 단체손님이 밀려든 식당처럼 붐볐다. 엄마는 자신의 식당에서 손님을 치르던 것처럼 의욕적으로 사람들을 통솔했다. 나는 조금 지쳤지만 음식 나르는 것을 거들거나 앉아 쉬었다. 따로 쉴 곳이 마련돼 있었지만 잠이 오질 않았고 사람들 속에 섞여 있고 싶었다.
장례 마지막 날 새벽. 2시간 남짓 잤을까 불경소리 같은 것에 눈을 떴을 때는 6시였다. 마지막 남은 장례음식을 마지막까지 남은 직계가족들이 모여 아침으로 먹었다. 화장터로 가기 전 발인식을 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열리는 순간, 코를 찌른 냄새. 살면서 전혀 맡아본 적 없는, 화장터가 있는 인도 바라나시에서도 네팔 카트만두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죽은 사람들의 냄새였다.
발인식은 장례식장 젊은 남자 직원의 사회로 진행됐다. ‘고인의’, ‘마지막 길’, 이런 단어가 들릴 때마다 모두의 어깨가 파도 타듯 들썩였다. 그제야 떠오르는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 왜였는지 그녀가 나 죽는다며 머리에 띠를 동여매고 등 돌리고 누워 앓자 울면서 그녀를 달래던 동생들과 그녀를 외면하던 나, 고향집에 갈 때마다 살을 파고든 그녀의 발톱을 잘라주던 나, 엄마에게 새된 소리를 내뱉던 그녀, 언젠가부터 ‘앓는 소리’로 각인된 그녀. 나를 이뻐해주었다던 모습이나 목소리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내 부모를 힘들게 했던 것들만 자꾸 떠올라 눈물이 말라갔다.
기차역 대합실과 은행 창구를 조합한 듯한 화장장에서 그녀는 15번을 달고 화장되었다. 한줌의 재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시간은 90분 남짓. 장례식장에서 화장터까지 우릴 태우고 온 버스의 운전기사가 가이드처럼 말했다. 시간이 좀 걸리니 저쪽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면 되겠다고. 식권을 구매해야 하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그녀를 화장터로 보내고 육개장 그릇을 깨끗이 비우는 상황이 어색해 헛기침이 자꾸 나왔다.
우리 중 밥을 먹지 못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밥을 국에 말아놓고 사라진 아빠를 찾아 화장터 곳곳을 헤매었는데 우리가 타고 온 버스 옆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걷어 올린 양복바지 밑으로 드러난 아빠의 발목, 어쩐지 콧날 시큰하게 만든 옆얼굴. 쓸데없는 말로 그를 웃기려, 혹은 그녀 생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도록 별별 소리를 늘어놓았다. 조용한 미소를 띠던 아빠는 계속 시간을 체크했던 것인지 화장이 끝날 예정시간을 10여분 남겨두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아빠는 그녀 영정이 바로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5번 창구에 뜬 ‘화장 중’이라는 글자가 ‘수골 대기’로 바뀌자 아빠는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엄마의 어깨를 툭 쳤다. 나는 그 뒷줄에 앉아 아빠의 뒷모습과 모니터 아래의 영정사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1차 수골 중’이라는 글자가 뜨더니 갑작스럽게 모니터가 켜졌다. 은쟁반 위 하얀 실밥 같은 것이 그녀의 유골인 모양이었다. 관리자가 휴지조각을 치우듯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유골을 쓸어담았다. 아마 모니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계 안으로 들어가 한 번 걸러진 그녀의 모습은 비실감을 안겨주었고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를 태우는 불길 하나 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재로 변해버린 모습에 모두들 당황스러워졌다. 나는 가슴 언저리를 꾹 누르며 그녀 시신이 놓였던 스테인리스 받침대 위에 눕기라도 한듯 몸을 떨었다.
영정사진과 함께 100여 미터 이동한 우리는 교도소 면회창구처럼 커다란 유리로 가로막힌 곳 앞에 섰다. 임산부는 보지 말고 뒤로 가서 서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보진 못했지만, 그곳에서 그녀의 유골이 가루로 부서진 모양이었다. 상복을 입지 않았다면 동물원에 놀러가 우리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는 어느 대가족의 뒷모습이라고 해도 옳을 풍경이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대한 호기심이 묵직한 슬픔을 뚫고 부유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이윽고 유리벽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그녀의 유골이 정중하게 나왔다. 마스크를 쓴 담당자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화장터를 나서는 길 K가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잘 살자, 행복하게.” 지천이 무덤이고 검은 상복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 화장장에서 우리는 이미 잘 살아 있으면서도 삶과 행복이 더 간절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3일쯤 지났을까, 욕실에서 이를 닦으며 무심코 거울을 보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그제야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게,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실감났다. 그것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그 다음 차례가 나라는 데 대한 어떤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볼 수조차 없다. 아빠가 그녀의 자리로 가고 내가 아빠의 자리로 간다는 게. 가장 후회된 게 전화였으니 종종 전화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녀의 죽음이 남긴 작은 다짐 하나.
이 글을 쓰고 묵혀둔 뒤로 몇 달이 흘렀을까. 책갈피에서 사진이 한 장 툭 떨어졌다. 노년으로 접어들던 시절의 그녀와 어린 나. 어느 책에 끼워져 있었는지, 누구에게서 이 사진을 받았는지, 사진 속 내 얼굴이 왜 뾰루퉁한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 잊었으면서, 아니 다 잊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실로 오랜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