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 없는 시대에 떠올려보는 명선쌤
"첫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저릿해요"라는 H양이 모처럼 질투라는 묵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제목을 완전히 수긍하던 나이에서 "그렇구나, 저 사람 진짜 열심히 했나보다, 멋지다" 하고 뒤돌아서는 시기로 넘어왔다. 아니 그런데 이번엔 샘나네. 내 맘은 거품 보송보송 내다가 욕실 한구석에 방치돼 쩍쩍 갈라지고 향도 다 빠져나간 비누 같은데. 가슴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뭐였더라? 역류성 식도염 말고, 카페인 과다로 심장이 나댈 때 말고, 가슴이 막, 두둥탁 두둥탁, 쪼이쪼이, 대체 뭐지?
그걸 되살려내려면 '발굴'이 필요했다. 뉴스에서 유적 발굴 장면 보여줄 때, 엄청 소중한 것을 다룬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져진 흙덩어리 위의 흙먼지를 스르르 붓으로 털어주던 그 행위. 그걸 내 기억에 대고, 마음에 대고, 소울에 대고 해봐야 했다.
'그 사람'과의 저릿저릿한 마음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자꾸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노랫말이 맴돌았다. 기억을 진짜 못하는 나여서, 보호본능으로 해로운 것 슬프고 힘든 것 다 잊어버리다 종종 그 곁에 붙은 좋은 것까지 까먹고 사는 나니까, '그 사람'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더듬더듬 남편과의 첫 만남, 첫 남자친구, 첫사랑을 다 지나쳐 도착한 곳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만든 학급문고 앞이었다.
십수년의 세월이 흘러 거리를 두고 당시의 나와 선생님을 내려다보면, 양친이 다 있었는데도 고아나 다름없던 내 마음과 애씀을 눈치 채신 게 아닐까 싶다. 부모님은 생계로 마음속에서조차 늘 부재중이었고, 그들의 고됨을 일찍 알아버린 나는 뭐든 잘 하려고 애쓰며 모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려 노력했다. 사람들 앞에 서면 갑자기 오줌이 마렵거나 목소리가 떨렸으면서도, 겉으로는 대범하고 잘 놀고 누구와도 원만했다. 당시에 MBTI를 해봤으면 E가 나왔겠지만, 현재의 INFP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중1 때 일주일에 한두 번, 가정 시간에만 봤던 선생님이 2학년 담임이 되셨다. 똥손에 망손인 나는 싹수부터 가정 과목과는 맞지 않았을 텐데도 선생님과 교감이 있었던 건지 너무나 기뻤다. 학기 초, 선생님은 학급문고를 만들었고 그 관리를 내게 맡기셨다. 책을 좋아하지만 집에 읽을 책이 별로 없었던 나는 교무실 선생님 뒷자리 캐비넷에 든 수십권의 책을 읽으며 교과서 밖 세상을 처음 만났다. 친구들의 도서 대여와 반납을 돕기 위해 캐비넷 열쇠를 받아들 때마다 설렜다. 아, 이거였나! 그 저릿저릿!
어느날, 선생님은 내게 2학년 전교부회장 선거에 나가보라고 했다. 그건 권유가 아니라 "오늘 당번 너다"라는 식의 가벼운 통보였다. 어찌저찌 해서 당선이 되었다. 그건 뻔한 성취감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낙관을 가져다주었다. 바쁜 엄마가 학교에 와보질 못해도, 학급일이나 학교일에 시간이나 돈을 내지 못해도 선생님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다.
가끔 선생님은 편지를 써주셨다. 흰 종이에 붓펜으로 단정한 글자가 빼곡했다. 그 사이 작은 그림 하나를 그려넣는 게 선생님만의 위트였다. 어른이 되고 '일'이란 걸 하게 되면서, 또 워킹맘으로 살아가면서, 같은 워킹맘이셨던 선생님이 바쁜 시간을 쪼개 제자들에게 손편지를 써주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가늠해보니 코끝이 찡해진다.
외식이라는 걸 선생님과 처음 해봤다. 소도시에서 유명했으리라 짐작되는 꼭대기층 레스토랑이었다. 돈가스였나 함박스테이크였나를 먹었는데, 길쭉하고 노란 게 파인애플인 줄 알고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가 그게 단무지였음을 알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 애써 태연한척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선생님은 도내 타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고1 여름방학 때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친구와 선생님을 뵈러 기차를 탔다. 이제 선생님의 학생이 아니라는 게, 선생님을 매일 만날 그 학교의 친구들이 부럽고 질투났다. 이후로도 선생님과 계속 연락을 나누었다. 오래된 편지묶음 속에서 수능을 앞둔 내게 보내는 선생님의 파이팅 문구와 편지가 발견됐다. 대학에 가서 이메일이라는 걸 만들게 되자 선생님의 이메일을 알아내 메일을 썼다. "선생님 저예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메일에서 선생님은 언제나 나를 기억해주셨다. 또 언젠가는 도시의 모든 중고등학교 홈페이지를 뒤져 선생님이 계신 학교에 전화를 걸어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과 연락이 닿지 않은지 10년이 넘었다.
이 글을 쓰다가 불현듯 휴대전화를 검색해 아직도 '명선쌤'이라고 저장돼 있는 선생님의 번호를 눌러봤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라고 나온다. 그럴 수밖에. 017로 시작하는 번호다. 지금은 휴면계정인, 생애 처음으로 만들었던 오래된 이메일 계정에 접속해본다. 2018년 선생님께 온 메일이 있다! 꺅, 두근두근!
아직 이 메일을 사용할까?
부모님은 아직 여기 계실까?
아직도 출판사에서 일 할까? 등등
그래도 한번 날려본다.
30대후반 중후한 여인이 되어 있겠지?
고향 오면 연락해
학교 그만두고 아주 자유롭게 숨쉬고 있다.
집도 전화도 그대로
단 나는 옛날에 전화기 고장으로 저장된 번호가 없다^^*
선생님께 답장을 써본다.
선생님 저예요. 95년도 OO여중 2학년 때 OO이요.
그때 선생님 딸과 또래인 딸이 있는 40대가 되었어요. 건강하시죠? 제 번호는요~
인생의 어느 시기든 혼자라 느껴질 때 내게 말 걸어주던 사람, 몸을 숙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 돌아올 것을 바라지 않고 내어주던 사람, 그땐 몰랐는데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 이게 가슴 저릿저릿함이었구나. 아주 오랜시간을 돌아와 알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베풀어준 마음들로 내가 조금은 더 나은 내가 되었음을.
#Day9 #그 사람 #야.나.써 #딱:삔